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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슈퍼히어로의 변주, <자토이치>

1962년과 2003년의 '자토이치'들과 기타노 다케시

장님에 머리를 깎은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 이야기>와 노랑머리에 장님 흉내를 내는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 1962년 처음 <자토이치 이야기>로 시작된 뒤, 영화, 텔레비전 등 많은 다양한 시리즈를 거쳐 2003년 다시 탄생한 <자토이치>. 2003년 기타노 다케시는 왜 새로운 <자토이치>를 만들었을까? 진정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새로운 자토이치일까? 2003년의 <자토이치>는 1962년의 <자토이치 이야기>와 어떤 연결점을 갖는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이와 같은 의문들.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해 이런 의문점들을 하나씩 풀어갈까 한다.

장님과 장님 행세, 이중의 무장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1960년대 일본사회를 돌아보자. 1959년의 미-일안보조약을 반대하는 격렬한 데모에도 불구하고 1961년 신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1960년대 본격적인 신안보체제 확립에 돌입한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인정하는 신안보체제란 일본이 미국을 완전히 일본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불완전한 형태의 국가체제를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1962년은 이와 같은 불완전한 일본을 새로운 ‘일본’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임무가 시작된 해이며, 안보투쟁에서의 좌절을 상대적인 일본사회의 안정의 무드로 무마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해이다.

같은 해 일본의 영화계에서는 이와 같은 안보투쟁의 좌절을 넘어서 이미 확립된 신안보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련의 일본식 슈퍼맨적 영웅을 내세운 시대극이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시기 슈퍼맨적 일본의 영웅은 건강하고 완전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외팔이에 외눈박이인 단게사젠이나, 장님인 자토이치처럼 신체에 결함을 가진 인물로 설정된다. 이들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일본이 오히려 더욱 강한 일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영웅상이었다.

그러므로 장님인 자토이치는 두눈을 가진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눈으로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볼 수 있는 슈퍼맨이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 역으로 말하면 모든 퍼스펙티브(시점)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장님이란 0의 시점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시점이며, 바로 마이너스의 시점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플러스의 시점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토이치의 무기는 칼만이 아니라 그가 장님이라는 사실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두개의 무기를 가진 셈이다. 불완전해 보이는 일본은 오히려 이중의 무장을 한 셈이다.

이런 일본의 이중적 무장이 현실화된다. 2003년의 일본은 유사법을 통과시키고, 자위대의 위상을 바꾸어 이라크에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지금은 테러리즘과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핑계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우려가 가장 극대화되고 있는 시기이다. 일본이 자신의 완전한 군대를 갖는 날, 일본은 완전한 국가로 탄생할 것이다. 이제 자토이치는 완전한 장님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장님인 것처럼 행동한다. 완전히 눈을 뜰 날을 기대하며….

그리고 1962년의 일본의 슈퍼맨 장님 검객 자토이치가 2003년에 새롭게 장님 행세를 하는 자토이치로 부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 시대극의 모자이크

기타노 다케시는 <자토이치>를 만들면서 비오는 날의 칼싸움 장면을 구로사와 아키라의 에서 빌려왔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빌려온 모티브는 영화 안에서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다. 농민의 등장이 그렇고, 마지막 화합의 춤이 그렇다. 그러나 <자토이치> 안에는 이와 같은 단순한 모티브 이상으로 더욱 다양한 일본의 시대극이 계승되어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기타노 다케시는 이를 영화 첫 부분에 모두 고백하고 있다.

영화는 길가에서 쉬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로부터 시작한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의 중간단계인 쉼으로 시작되는 이 첫 장면은 가쓰 신타로의 방랑자객 자토이치의 계승임과 동시에 일본 마타다비 시대극의 계승이다. 마타다비영화로 불리는 일련의 시대극의 역사는 길다. 어디로 나갈 곳 없이 사방이 바다로 막혀, 완전히 폐쇄되어 있는 섬나라 일본에서 실제로 떠난다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떠나고 싶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마타다비영화를 탄생시켰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의 처음을 마타다비의 계승으로 연다. 그 다음 신은 바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남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복수는 일본 시대극의 가장 전형적인 소재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소가 형제의 이야기는 부모의 원수 갚기의 한 예이며, 나아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어서는 47명의 사무라이의 이야기인 <츄신구라>는 일본 복수시대극의 전형이다. 다음은 자릿세를 받으러온 야쿠자가 등장한다. 악한 야쿠자와 사무라이, 혹은 착한 야쿠자가 대결을 벌이는 것 역시 일본 시대극영화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 다음 신은 바로 칼잡이인 아사노 타다노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칼잡이의 등장이 일본 사무라이 시대극영화의 전형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토이치>에서 칼잡이 아사노 타다노부는 단지 그가 칼잡이 사무라이라는 것 이외에도 두 가지 면에서 또 다른 일본 시대극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첫 등장 장면을 보면 칼싸움을 하는 그의 등 뒤로 폐병에 걸린 부인의 모습이 보인다. 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칼잡이가 되어야 하거나, 병에 걸린 아내 때문에 고뇌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요쓰야괴담을 상기시킨다. 또한 아사노 타다노부와 기타노 다케시가 벌이는 해변에서의 마지막 결투장면은 <미야모토 무사시>의 마지막 장면인 사사키 고지로와 무사시와의 결투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이처럼 기타노 다케시가 영화의 첫 부분을 일본 전통 시대극의 대표적인 4가지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자토이치>가 <자토이치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본의 전통적인 시대극의 틀마저 모두 벗어던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아니 아무리 그가 노랑머리의 자토이치를 등장시키고, 마지막에 장대한 탭댄스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일본 전통 시대극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이 영화의 첫머리를 전형적인 일본 시대극영화들로 열고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일본 전통 시대극의 요소들이 이미 기타노 다케시의 다른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와 LA로 상징되는 일본 밖으로의 열망, 늘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인 기타노 다케시 영화 속의 비트 다케시, 해변과 야쿠자, 병든 부인…. 그러므로 아론 제로가 말하듯이 기타노 다케시는 <하나비>를 통해 비로소 일본적인 것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장 일본적인 것을 영화 속에 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하나비>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어 보여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가 일본 시대극 <자토이치>를 만들기 전에, <돌스>를 통해 전통 분라쿠의 형식을 실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웃기 시작하는 다케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 이야기>와 다른 지점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다른 지점이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를 더욱 일본적인 영화로 만든다.

우선 자유인 자토이치에 대한 접근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토이치는 방랑자, 자유를 좇는 자이다. <자토이치 이야기>는 여인이 기다리는 큰 거리를 뒤로하고 그만이 알고 있는 뒷길을 따라 유유히 걸어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는 자신의 임무를 모두 수행한 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길을 따라 떠난다. 그러나 <자토이치>는 길을 떠나려던 기타노 다케시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정지화면으로 끝을 맺는다. <키즈 리턴>의 두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계속 운동장을 돌던 것처럼 결국 기타노 다케시는 먼길을 떠날 것 같아도 떠나지 못하고 돌아온다. 일본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코 그는 일본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는 여성이 배제된다. 등장한다 하더라도 죽거나 아프거나 그렇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아내는 남편이 죽자 바로 할복자살로 영화 속에서 사라진다. 부모님의 복수를 갚기 위해 전국을 떠도는 남매 중에서 영화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여장을 한 남동생이다(<자토이치 이야기>의 마지막 칼싸움 장면에서 자토이치의 칼에 맞은 칼잡이 히라데가 자토이치의 등에 업히는 장면 등을 남성간의 동성적 코드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자토이치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는 위험에 빠진 여성을 구해줌으로서 여성을 영화 속에 남겨놓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영화 속의 여성 배제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무라이 정신이 가득한 일본영화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영화 속에서 웃음을 감추어왔던 기타노 다케시가 영화 속에서 웃기 시작한다. 일본 최고의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 속에서 자신이 코미디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숨겨왔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그는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일본의 관객이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에 동화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자토이치>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웃기 시작한다. 그가 TV에서 늘 보여주는 기타노 군단적 코미디 요소를 도입할 뿐 아니라, 자신이 웃기 시작한다. 사실 웃음이란 가장 국가적, 문화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일본의 대중들이 아는 웃음, 함께했던 웃음이 <자토이치> 안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가 노랑머리의 자토이치를 등장시키고 탭댄스로 변화를 주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일본인이 함께 춤추는 진정한 화합의 일본적 <자토이치>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수완/ 일본영화사 연구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