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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21세기형 한국 문화기업의 모델을 기대한다
2004-02-10

최근 한국 영화산업 대표 주자들의 합종연횡이 줄을 잇고 있다. 시네마서비스(사진)가 플레너스로부터 물적분할하여 독자노선의 길을 모색하고 있고, 명필름과 강제규필름은 기존 상장회사와 주식교환 형식으로 하나의 회사로 결합했다. 싸이더스는 코스닥 등록기업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였는가 하면, 매니지먼트 회사인 싸이더스HQ는 상장회사 주식을 매입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흥미로운 건 ‘메이저 레이블’이라 할 수 있는 싸이더스, 명필름, 강제규필름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기업변동의 방향은 다소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 이후 한국 영화산업의 변화는 대부분 수직적 통합화를 향해 움직여왔다. 이는 전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거니와 할리우드에 대항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확립해야 하는 한국 영화산업에서는 일종의 당위로 생각되어져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세 회사는 이러한 흐름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정은 있다. 수직적 통합기업에 있어서 경제적 파워는 극장에 있고, 콘텐츠 파워는 (투자)배급사에 있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까지 영화산업의 핵심을 차지했던 제작 주체들의 파워는 갈수록 약화돼왔다. 사실 창의력과 제작운용상의 노하우와 숙련된 인력과 같은 무형의 자산만을 갖춘 한국 제작사들의 입장에서는, 그간의 수직적 통합의 추세에서 자본을 대는 주체들에 밀려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크게 느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 좀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제작사들로 하여금 기존의 영화 메이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면서도 독자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업결합을 추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영화가 산업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돈을 들인 만큼 영화의 볼거리가 담보되어야 한다는 생각, 투자자에게 이익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생각, 주식시장에 공개된 영화사는 주주들의 이익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한국 영화산업 주체들에게 이제 거의 강박관념 내지 윤리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재정의 윤리학’은 산업적 근대화가 이제 막 자리를 잡은 한국 영화산업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산업은 그 특성상 문화적 가치를 담보해야 하며, 재정적 이윤을 위해서도 여타의 산업에 비해서는 훨씬 높은 수준의 창의적 개척정신을 필요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싸이더스와 명필름은 그동안 수직적 통합기업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도 자신들만의 색채를 강하게 가져온 한국영화 제작의 대표주자들이었고, 이러한 개성과 고집으로 인해 최근 재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기도 했다. 이 두 회사가 과연 자신들의 바람대로 과도한 재정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영화를 만들면서도 모회사나 주주들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을지, 그리하여 재정의 윤리와 문화적 가치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21세기형 한국 문화기업의 모델을 보여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격변하는 한국 영화산업에서 굳건하게 버텨온 이들 기업의 저력을 생각한다면 희망쪽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조준형/ 경희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