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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록 아티스트와 시네아스트의 멋진 만남
심은하 2004-02-18

유앤미블루 출신 이승열과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secret〉뮤비

<올드보이>의 박찬욱이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한다. 함께하는 뮤지션은 이승열이다. 이승열이 누구냐고? 90년대 후반에 해체됐던, 모던록 밴드 유앤미블루를 아는지. 단 두장의 앨범으로 ‘한국 모던록의 전설’이라는 평을 들었던 2인 밴드, 유앤미블루 멤버는 방준석(영화음악을 주로 하는 음악인들의 모임, 복숭아 프레젠트- <씨네21> 434호 참조- 의 일원이다)과 이승열이다. U2의 보노, 혹은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음색을 지닌 이승열은 최근 <이날, 이때, 이즈음에…>라는 솔로앨범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그 앨범의 타이틀곡 〈secret〉을 박찬욱이 뮤직비디오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색이 뚜렷한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고, 각기 다른 장르의 문화가 만난다는 뜻의 ‘컬처잼’에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10여년 전의 인연

밤 11시, 차가움과 축축함이 기묘하게 어울리는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두 남자를 만났다.

한국 모던록의 ‘저주받은 전설’은 의 에미넴을 떠올리게 하는, 검정색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으로 나타났다. 노래할 때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게 말투는 작고 조심스럽다.“인연의 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앤미블루 시절, 감독님이 저희를 소재로 한 로큐멘터리를 만들 뻔했던 일, 그리고 이번 뮤직비디오의 촬영감독이 정정훈이라는 것도요.”

첫 장편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만들고 난 뒤, <삼인조>를 준비하던 박찬욱은 당시에 로큐멘터리 제의를 받았었다고 한다. 제작사의 사정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거기에다 <올드보이>의 촬영감독이자 이번 뮤직비디오의 촬영을 맡은 정정훈은 유앤미블루의 첫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게 모두 10여년 전 일이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아는, 그걸 이용하는 시네아스트, 들리지 않는 소리도 소리로 만들어내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가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시라- 음악의 결을 누구보다도 이해하는 그에게 뮤직비디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뮤직비디오의 시작은 음반의 광고죠. 그래서 음악을 받쳐주는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거고. 너무 잘 만들면 음악이 묻히는데다가 일단 영상이 나오면 음악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니까 그게 딜레마죠. 하지만 뮤직비디오가 음악만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으면 독자적인 예술 매체로 성립하는 거고, 아니라면 그냥 가라오케 배경이면 되지. 왜 파도 넘실거리는 거 말예요. 이승열의 〈secret〉이 흔한 유행가 가사들처럼 스토리가 있었다면 아마 작업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secret〉은 가사가 명료하지 않아요. 기승전결도 없고, ‘save yourself’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죠. 그 말이 뇌리에 남아서 작업이 자유로웠죠.”

그건 성경구절을 연상시킨다. 박찬욱은 잠언의 한 구절이라며“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라고 줄줄 외웠다. 게다가‘내가 알고 있는 비밀이 네게 중요할 것 같아서 네게도 가르쳐주려 해’라는 〈secret〉의 가사는 <올드보이>의 상황을 연상하면서 들으면 저절로 의미심장해진다.

이승렬의 솔로 데뷔 앨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올드보이>에서 이유도 모른 채 15년간 '갇힌 자'가 풀려난 뒤 이유도 모른 채 괴한들에게 집단 폭행당하는 장면. 콘티에 넣었다가 제외된 것을 그대로 살려냈다.

〈secret〉와 <올드보이>는 닮았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타이즈로 작업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줄거리도 없고 상황만 있을 뿐이죠. 한 남자가 괴한들에게 두들겨맞는 거예요. <올드보이>의 스토리보드에 있었지만 실제로 찍지는 않았던 장면이죠. 근데 비장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스꽝스럽죠. 조악하고 엉성하고 어설프고, 그게 이 뮤직비디오의 컨셉이에요.”

거짓말! 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치밀함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일부러 만들어낸 ‘조악함’의 모양새가 궁금해진다. 어항이 깨지고, 물고기가 날고, 꽃잎이 피처럼 흩날린다니, 브뉘엘이나 장 콕토 영화의 즐거움을 기다려도 좋을까.

<무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올드보이>의 컴퓨터그래픽을 담당했던 팀들이 이 작업을 함께했다고 한다. 정지화면 위에 여러 개의 이미지가 겹치기도 하고 ‘입만 살아서’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에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 무척 많다고. 그 결과물은 연기를 한 이승열 자신도 아직 본 적이 없다.

“저는 어떻게 나올지 전혀 상상이 안 돼요. 그냥 열심히 했어요. 그냥 내가 이 비디오의 주인공이다, 그러면서.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내가 주인공인 꿈,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아주 멋진 선물을 받은 것처럼.”

두 남자는 비슷한 구석이 좀 있다. 둘 다 미학을 공부했고 저주받은 걸작을 만들었고‘그늘’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블루(blue)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박찬욱은 거짓말처럼 푸른색 셔츠를 입고 푸른색 필통과 푸른색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영화에서 블루를 주요색으로 작업할 예정이라고. 두 사람이 가슴속에 칙칙함을 간직한 게 닮았다고 하자 이승열은 정색을 하며“그런 게 보이나요?” 되묻고, 박찬욱은 “영화는 그래도 나는 안 그런 사람인데, 난 웃긴 사람인데”라고 농담한다.

이게 또 두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이승열이 수채화톤의 투명한 블루라면 박찬욱은 유화물감으로 군데군데가 엉겨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루다. 서로 다른 질감의 두 블루가 만난다면?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견고한 자기세계를 구축한 두 사람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 한바탕의 잼을 이룬다면? 갑자기 그 순간이 미치도록 기다려진다.

정안나/ 연극인 thanna@hanmail.net·사진 정진환 terran6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