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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의 할리우드 콤플렉스, <태극기 휘날리며>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태극기 휘날리며>

지난 1월에 허리우드극장에서 있었던 한국영화 50년 회고전에서는 김수용 감독의 1981년작 <만추>를 상영했다. 김수용 감독은 상영 뒤에 있었던 Q&A에서도 참가했었는데, 아마 지금은 사라진 이만희 감독의 원작에 대한 기억과 리메이크 버전의 해석 차이에 대해 듣고 싶었던 사람들은 구체적인 정보없이 막연한 일반론으로 채워진 답변에 실망했을 것이다.

<만추>에 대한 답변보다 더 재미있는 말은 그뒤에 나왔다. 이야기를 맺으면서 김수용 감독이 미리 본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열광적인 찬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영화가 주는 감동에서 시작해 할리우드에 대한 장엄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선언으로 끝나는 이 노감독의 연설을 들었던 관객은 아마 대부분 두 가지로 갈렸을 것이다. 하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정말 괜찮게 나왔나보구나. 둘. 거의 반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100여편의 영화들을 만들며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는 거장의 소리를 듣는 이 양반에게도 할리우드의 때깔은 무시못할 콤플렉스였나보구나.

콤플렉스는 강제규의 이전 영화들을 설명하는 데에도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는 표현이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로 이어지는 강제규의 영화들은 모두 콤플렉스와 의무감의 산물이었다. 다른 나라에 내보내도 꿀리지 않는 근사한 때깔의 양질의 오락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콤플렉스. 영화들이 성공을 거듭하면서 그의 정복 목표는 조금씩 올라갔다. <은행나무 침대>가 시작될 무렵, 그 경쟁상대는 쇠락 중인 홍콩 영화계였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목표는 메이저 영화사에서 만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다.

진부한 소재를 ‘쿨’하게 업데이트

<태극기 휘날리며>를 볼 때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게 분단 상황을 다룬 주제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한국전쟁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전쟁영화로서의 가치이다. 강제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견줄 만한 또는 능가할 만한 전쟁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남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우리만의 손으로.

물론 여기서 분단은 아주 중요하다. 강제규가 분단 상황에 대해 특별히 말하고 싶은 구체적인 메시지를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반세기 전 이 나라를 찢어놓았던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우리가 독점해 다룰 수 있는 근사한 영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의 전작 <쉬리>도 특별히 다를 게 없다. <쉬리> 역시 분단 상황에 대해 뭔가 새롭고 도전적인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상황에 대해 대중이 품고 있는 정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영화 속에 투영했을 뿐이다. <쉬리>의 성공은 대중을 앞서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는 척하며 이미 존재하는 정서에 편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의 각본은 <쉬리>처럼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거의 진부하게 느껴지는 소재를 ‘쿨’하게 업데이트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목표는 낡은 소재의 때를 지워내고 알맹이의 정서적 힘을 최대한으로 뽑아내 이미 존재하는 잠재 소비자들의 구미를 맞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영화는 사상과 이념을 지워버린다. 전쟁의 참혹함과 광기를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구체적인 비판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디테일 역시 사라진다. 전쟁은 보편화되고 허구의 공간에서 특별한 사전 정보를 갖추지 않은 외국 관객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스펙터클의 재료로 다시 태어난다. 한마디로 시장폭이 넓어지고 감정을 자극하는 기계로 성능이 향상된 것이다. 영화는 찡하고 잔인하며 압도적이며, 충분한 수의 관객이 이 정서적 자극에 직접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이런 시도를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전혀 없다. 영화마다 각자의 목표와 존재 이유가 있는 법이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자기만의 목표를 거짓없이 성취했다. 한국전쟁이라고 보편적인 전쟁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며 늘 이념에 매달리라는 법도 없다. 오히려 이런 식의 접근법은 같은 전쟁의 다른 측면을 다루는 성실한 접근법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서로를 지르고 쏴대며 죽어간 사람들 대부분에게 이념은 코앞에 닥친 공포와 고통만큼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잊는다고 해도, 우리의 전쟁이 스펙터클의 재료로 탈바꿈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뭐가 있는가? 우리가 겪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후대의 문화상품을 위한 잠재적 재료이며, 이는 우리가 어떤 당위를 내세우며 바로잡으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짝퉁 영화

문제는 강제규의 영화들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관계가 점점 위태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쉬리>는 (개인적으로 무척 지루하게 본 영화이긴 하지만) 개봉 당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에 견줄 만한 액션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된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짝퉁 영화이다.

두 영화의 유사점은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영화가 제작되는 동안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었다. 어떤 때는 도전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어떤 때는 겸허하게 따라야 할 교과서이자 전범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도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의 기술적 성취도는 놀랍다. 일대일로 비교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능가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시작한 위치와 제작비, 앞으로의 전망을 고려해보면 결코 꿀릴 게 없는 성과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술적 성취도와 때깔은 비교적 덜 중요하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 <태극기 휘날리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수준의 영화로 느껴지는 대신 짝퉁처럼 보이는 걸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각본이 월등하게 뛰어나기 때문에? 그건 아닌 것 같다. 얄팍한 역사인식이나 감상주의, 직설적인 설교에 대해 하나씩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각본 역시 특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렇다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각본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 둘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암흑의 핵심>식 오디세이이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모래시계>처럼 비교적 긴 역사의 흐름에 휩쓸리며 변해가는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 바로 이 분명한 차이점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두 영화의 비교 가능성을 예상하는 동안에도 비교적 안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스타일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 일단 스타일 면에서 <태극기 휘날리며>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아류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채도를 반쯤 날린 화면, 핸드헬드 카메라의 활용, 호러영화를 능가하는 참혹한 묘사는 모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충실한 모방이다. 이 영화에는 자기만의 스타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의성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테크닉과 스타일을 극대화할 수 있느냐에 집중된다. 그 결과 <태극기 휘날리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가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유명하게 한 모든 요소들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몇배로 부푼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찍은 장면 수나, 피투성이 특수효과나, 대규모의 전투장면들은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 ‘원작’을 능가한다.

그 결과 <태극기 휘날리며>는 모든 것들이 과한, 여유가 부족한 작품이 되고 만다. 여기에 재미있는 법칙이 하나 있는데, 성공적인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와 실제 영화 사이에는 언제나 큰 갭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자를 따라간 영화이다.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압도적인 이미지와 힘을 모방하느라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작 스필버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던 시와 정적과 사색의 여유를 날려버렸다(또는 자신만의 시와 정적과 사색을 채워넣지 못했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결코 스펙터클을 위해 드라마를 포기할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찌됐건, 이 영화의 스펙터클이 최종 목표인 ‘눈물 짜는 감동의 드라마’를 위한 도구임은 명명백백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토끼를 쫓아가는 거북이와도 같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토끼가 잠시 멈추어서서 낮잠을 자거나 숲속 경치를 즐기는 동안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거북이는 감동과 스펙터클의 목표를 위해 우직하고 성실하게 기어간다. 문제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고 먼저 빨리 도착하는 것 역시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방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후발 주자의 한계이다. 스필버그는 자신이 할 줄 알기 때문에 전쟁장면을 넣기 전에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하는 강제규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다. 그는 움직이고 빈자리를 채우고 어떻게든 선발 주자를 이겨야 한다. 그가 이런 조바심을 던져버리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슬슬 할리우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방법밖에 없다. 슬슬 그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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