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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 회고전] - [2]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 보는 4가지 방법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 보는 4가지 방법

1. 구로사와 기요시 세계의 출입문

<큐어> - 아직 구로사와 기요시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큐어>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왜 ‘공포’에 집착하는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이란 무엇인지, 세계의 황량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모든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세기말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연쇄살인사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흉기를 휘두르는 잔학함, 그러나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범인들. 다카베 형사는 의대생이었던 마미야의 최면이 그들의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냈음을 알게 된다. <큐어>는 장르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자신만의 롱숏과 원신 원컷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죽어 있는 시간이, 어떻게 생생하게 살아나며 관객의 마음을 덮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카리스마> - 이미 구로사와 기요시를 알고 있는, 애호가를 위하여

최근 신작을 발표한 소설가 김훈은 ‘세상은 폭력으로 유지된다’고 말한다. <카리스마>의 세계는, 그의 단언으로도 해석된다. 인질을 죽이고 범인이 자살한 사건 때문에 문책받은 야부이케 형사는 휴가를 떠났다가 이상한 숲을 발견한다. 주변의 모든 나무를 독으로 물들이는 ‘카리스마’란 이름의 나무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다양한 입장으로 갈려 싸우고 있다. 기묘한 싸움에 말려든 야부이케는 숲과 나무 모두를 구하려 하지만,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결국 세계의 종말을 목격하게 된다. <카리스마>는 공포를 자극하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공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그 자체를 목도하게 만든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폭력이 아닐까. 과연 인간과 자연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인간은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거대하지만 답이 없는 질문을 자꾸 떠오르게 한다.

2. 구로사와 기요시의 미래를 만나 보자

<밝은 미래>와 <도플갱어>

지난해에 만든 <밝은 미래>는, 역설적인 제목이다. <카이로> 이후 ‘희망’을 말하기 시작했던 구로사와 기요시는, 체 게바라의 티셔츠를 입은 불량 청소년들에게서 미래를 본다. 가까이 오는 이에게 독을 뿜어내면서도, 언제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해파리 같은 존재들. 대화가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대화는 해야 한다. 회사 사장을 몽둥이로 때려죽인 마모루는, 자신이 키우던 해파리를 공장 동료인 유지에게 맡긴다. 몇년 만에 나타난 마모루의 아버지를 만난 유지는,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소통’을 시도한다. 그건 <인간합격>의 요시이도 마찬가지다. 10년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요시이는, 흩어진 가족을 한데 모으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 일상은, <거대한 환영>의 연인 하루와 미치가 지나치는 평범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 자살과 노상강도 등 폭력적인 사건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지만, 그들의 일상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꽃가루가 하늘을 뒤덮은 2005년의 미래에서, 하루와 미치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찾아야만 한다. 상영작에 포함되지 않은 <카이로>는, 일상에 마모되는 그들이 하나둘 귀신으로 변해버리고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다.

<도플갱어>는 다른 의미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미래다. 인공 신체를 연구하는 과학자 하야사키의 딜레마를 다룬 <도플갱어>는 장르를 넘어선 장르영화다. 장르의 연금술에 탁월한 재능을 선보였던 구로사와 기요시는 더이상 장르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다. 구태여 그걸 뛰어넘는다거나, 변형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의 길을 간다. <도플갱어>의 느슨함,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느림이나 반복되는 의미의 미끄러짐 같은 것들이 의아했다면 이번 회고전의 <거미의 눈동자>이나 <복수:지워지지 않는 상흔>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르를 초월한 자신만의 장르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3. V시네마로 닦은, 장르의 연금술 - 공포와 스릴러

<지옥의 경비원>과 <강령>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언제나 일상을 말한다. 일상의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를 습격한다. <지옥의 경비원>은 B급 호러영화의 스타일을 빌려온 영화이지만, 끝까지 살인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환원론적으로 결말을 짓는 할리우드의 공포영화나, 비주얼 자체에 탐닉하는 유럽의 고어영화들과는 달리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는 일상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직장에서 야근할 때, 조용히 들어온 경비원이 갑자기 등 뒤에서 몽둥이를 내려친다고 생각해보자. 그건 국민을 지켜준다는, 국민의 의지로 만들어진다는 근대 국가의 환상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순간이다. <스위트 홈> <지옥의 경비원> <도어3> 등 구로사와 기요시의 초기 공포영화는 할리우드 B급영화를 인용하면서도, 자유롭고 느린 자신만의 스타일을 잃지 않았다. 2001년의 <강령>은 할리우드 대신, 당시 유행인 일본 공포영화의 소재를 가져왔다. 영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준코는, 아주 사소하고 나약한 욕심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강령>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나약하고 어리석은 우리 자신이다. 왜 우리는, 인간은 이리도 어리석고, 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가. 그 어리석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공포로 돌아온다.

<복수: 운명의 방문자>와 <뱀의 길>

이 액션스릴러영화들의 테마는 ‘복수’다. <복수: 운명의 방문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가족을 살해당한 형사가, 과거의 범인들을 만나 복수의 길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뱀의 길>은 딸이 유괴, 살해된 뒤 그 범인들을 잡아 사형(私刑)을 감행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한가운데에 놓인 그들은, 결코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혹시 엉뚱한 사람을 납치하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에, <뱀의 길>의 니이지마는 답한다. ‘상관없어’라고. 그들에게는 절실한 이유가 있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뱀이나 거미가 되어야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하드보일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그것은 <카이로> 이전에 일관되게 추구하던 주제였다. 세상은 폭력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 반기를 들고 폭력을 택한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순이던가.

각각의 속편이라 할 <복수: 지워지지 않는 상흔>과 <거미의 눈동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타일을 더욱 강하게 보여준다. 시리즈물을 만들 때, 1편은 장르의 쾌감을 한껏 느낄 수 있도록 정통적으로 만들고 2편은 자신의 방식대로 만든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들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장면, 그 길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카이로> <도플갱어> 등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걸어가는 장면처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은 묘한 여운을 남겨준다. 쓸모없는 장면에서, 자신의 리듬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도플갱어>의 돌연한 웃음이나 파열된 구조가 의아했다면, 이 작품들에서 원류를 만날 수 있다. 장르의 법칙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길로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이끌어내는지를.

4. 구로사와 기요시의 근원, 60년대를 만난다

<간다가와 음란전쟁>과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횟수의 정사장면만 넣으면, 나머지는 마음대로. 이런 자유 때문에 모리타 요시미쓰, 나카하라 준 등 수많은 감독들이 로망포르노로 자신의 영화경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런 정도의 유로도 포섭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70년대 이래, 섹스와 정치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간다가와 음란전쟁>은 도쿄 주택가를 흐르는 간다천을 사이에 두고, 계급간의 갈등이 벌어지는 사회적인 로망포르노다. 아들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는 기묘한 중산층의 뒤집힌 모럴에, 몸을 파는 여인들이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간다가와 음란전쟁>은 도착적인 줄거리에 불연속적인 편집으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당시 구로사와 기요시는 ‘명작에 바치는 오마주야말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충성의 증거라고 생각’했고, 이미 존재했던 영화에 관한 영화에 몰두했다. 그것은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에 더욱 과격하게 반영되어, 로망포르노답지 않다는 이유로 개봉이 중단되고 재촬영과 편집을 거쳐 기형적이면서도, 가장 구로사와 기요시다운 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연인을 찾아 도쿄의 대학에 온 아키코가 보게 되는 대학 곳곳의 기묘한 성적(性的) 풍경이 펼쳐진다. 멜로, 코미디, 뮤지컬, 사이코드라마 등 갖가지 장르가 혼재하고 <미치광이 피에로> 등 고다르의 영화에서 영향받은 장면들이 나온다.

<네 멋대로 해라> 시리즈

V시네마 시리즈물로 만들어진 <네 멋대로 해라>는, 제목에서부터 장 뤽 고다르의 영화가 연상된다. 주인공 역시 사회 부적응자인 불량배다. 유지와 코사쿠는 동물 찾기부터 불륜 캐기, 빌린 돈 받기 등 사소한 일도 마다않는 해결사다. 폼을 잡기는 하지만 늘 야쿠자에게 맞고다니는 두 남자의 소망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연히 만난 OL에게서 다량의 헤로인을 얻기도 하고, 야쿠자 두목의 딸과 사랑에 빠져 곤경에 처한 남자와 호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곳은 제자리다. <네 멋대로 해라>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일상의 쳇바퀴를 돌아가는 건달들의 소동기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2년 동안 만들어낸 6편의 액션소동극은, 정말 코믹하면서도 가슴을 울린다. 모든 장르를 섭렵한 하워드 혹스의 재능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마지막 편인 <네 멋대로 해라: 영웅계획>은 제목 그대로, 정말 감독 멋대로 진행된다. 정치가가 되기 위해 자작극을 꾸민 남자의 음모에 말려들어간 유지는 혼자 도망을 친다. 1년 뒤, 유지는 홈리스의 지도자가 되어 돌아온다. 왁자지껄한 소동극이 이상한 정치 드라마로 바뀐 듯하더니, 어느 틈엔가 구로사와 기요시는 유지와 코사쿠의 싸움을 68년의 투쟁과 겹쳐버린다. 이제 여기는 끝났어. 니이가타로 갈까? 회한(悔恨)어린 농담을 주고받으며, 두 남자는 절뚝거리며 최루탄이 난무하는 밤거리를 뛰어간다.

유지와 코사쿠는 야쿠자 조직에 들어갈 생각 따위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의 톱니바퀴에 들어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이탈자인 척하지만, 야쿠자 조직 같은 것도 실제로는 사회의 일부다. 유지와 코사쿠는 사회의 바깥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네 멋대로 해라’라는 구호는 유지와 코사쿠의 삶의 방식이다. 아무리 추레하고, 아무리 조잡해도 그들은 자신의 원칙을 버리지 않는다. 그 삶의 방식은 바로, 전공투 투쟁이 끝난 70년대에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길이었다. 정치인이 되거나, 사업가가 된 과거의 동료들과는 달리 소수의 그들은 사회의 바깥에서,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다. 무라카미 류의 말대로 70년대 일본의 마이너 출판사나 영화사에는 늘, 학생운동의 패잔병이 있었다. 그들은 싸움에서 졌지만, 결코 사회와 권력에 의존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싸움을 계속했다. 유지와 코사쿠처럼, 비루하고 타인의 웃음을 사는 싸움일지라도.

아이카와 쇼(哀川翔)

V시네마의 제왕

<네 멋대로 해라> <복수> <뱀의 길> 등 액션이 들어간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은 배우는 아이카와 쇼다.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와 <흑사회> 시리즈 등에서도 주연을 맡은 아이카와 쇼는 V시네마의 제왕으로 불리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로 야쿠자와 형사 등 강렬한 역을 맡았을 뿐 아니라, 올해 100번째 주연작 <지브라맨>을 개봉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연기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100번째 주연 기념작의 감독은 아이카와 쇼 못지않게 많은 영화를 연출한 미이케 다카시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 보면 아이카와 쇼는 약간 왜소한 체구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와 어깨를 겨루고 있으면,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그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V시네마에서 아이카와 쇼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다케우치 리키와 공연했던 <데드 오어 얼라이브>에서, 아이카와 쇼는 거대한 체구의 리키를 압도한다. 힘의 세계는 단지 체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카와 쇼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단이 있다. 코믹 연기로 승부해야 하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아이카와 쇼는 웃음 뒤의 분노와 슬픔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복수>와 <뱀의 길> 같은 정통 하드보일드영화에서 보여주던 그 결기가, <네 멋대로 해라>의 한순간에도 여지없이 전달된다.

▶ 9일부터 개최, 상영시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