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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 혹은 이름의 생명에 관하여

인디언들이 이름을 짓는 방식은 우리와 아주 다르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을 그대로 따서 이름을 짓는다. 특히 아이가 태어날 때 발생한 사건이나 그 주변에 있던 사물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태어날 때 천둥이 크게 쳤다면 ‘구르는 천둥’이 되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면 ‘바람의 아들’이 된다. 옆에 황소가 앉아 있었다면 ‘앉은 황소’, 하늘에 매가 날고 있었다면 ‘나르는 매’ 등과 같은 식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짓는 것만은 아니다. 가령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경우 곰이 주는 다양한 감응을 연결해 이름을 지었다. 서 있는 곰, 곰이 노래해, 곰의 마음, 노란 곰 등등. 곰만이 아니라 독수리, 거북이, 여우, 들소, 말, 고라니 등의 동물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름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름 또한 한번 짓는 걸로 고정되지 않아서, 중요한 사건을 겪거나 새로운 재능을 탁월하게 발휘했을 때, 혹은 어떤 업적을 이루었을 때 다른 이름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점에서 인디언의 이름에는 ‘외부’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때로는 묘사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아이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동물적인 감응에 따라. 그것은 흔한 말로 ‘고유명사’지만, 개인에 고유한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아이에게 기대하는 어떤 동물이나 사건의 특이성을 표현한다. 즉 그들의 이름에서 진정으로 ‘고유한’ 것은 곰이나 고라니, 독수리의 특이성이다. 이로써 그들은 아이와 동물, 아이와 자연이, 혹은 아이와 세계가 함께 어울리길 빌었을 것이다.

성(姓)이 없던 이들과 달리 서양인의 이름은 성으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성’에 해당하는 가족명이 있고, 그 앞에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이 주어지며, 그 아이에 고유한 명칭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다. 폴, 피에르, 요한, 마리아, 크리스틴 등등. 여기서도 고유명사는 명명된 개인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귀결된다. 다만 인디언과 다른 것은, 함께 사는 동물이나 자연과 상생하라는 기원보다는 조상의 음덕이나 미덕이 함께하길, 혹은 그것으로 조상의 이름이 이어지고 연속되라는 기원이 깔려 있다. 동물이나 사건이 특이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조상으로 이어지는 동일성이 이름을 통해 작동한다.

우리의 이름은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 있다. 조상의 혈통을 잇는 ‘성’이 있고, 그 혈통 안에서 위치를 표시하는 돌림자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봄의 향기’나 ‘꿈속에 본 용’, ‘커다란 여름하늘’ 같은 시적인 이름을 사용한다. 한자로 짓기에 대개 잊혀진 채 불리고, 자연이나 사건에 대한 관심보다는 글자간의 조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지어진다는 점에서 인디언과 다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고유명사가 정말 ‘고유성’을 획득하는 것은 그 이름이 개인적인 고유성에서 벗어나게 될 때다. 가령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단지 독일 출신의 어떤 한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과 혁명을 사유하려는 순간 언제나 떠오르게 마련인 어떤 특이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특이하기에 차라리 보통명사라고 불러 마땅한 일반성을 갖는다. 이 경우 이름은 타인들의 흔적이 새겨진 이름이 아니라 타인들의 삶에 흔적을 남기는 이름이 된다.

최근에 작고하신 김진균 선생님의 이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지식인, 실천, 변혁의 꿈, 그리고 많은 이견을 싸안는 커다란 품 등이 계열화되며 만들어지는 하나의 특이성이 그 이름에 한 사람의 신체로부터 독립된 일반성을 부여한다. 이처럼 이름이 정말 고유한 특이성을 형성하게 되면 그것은 고유명사에서 벗어나 보통명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특이성이 문제될 때마다 반복하여 되살아나는 생명을,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 시대를 전심으로 돌파한 그분의 죽음에서 죽지 않는 법을 다시 배운다. 아니, 그분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이진경/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