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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릴레이] 구로사와 기요시 회고전, 김소영 교수

수치심을, 느끼지 않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누가?

일본 감독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고전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9일부터 3월19일까지 열리고 있다. 1983년작인 <간다가와 음란전쟁>부터 2003년작 <도플 갱어>까지 21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생각해보면 무엇에 대한 ‘회고’ 모드로 접어들기에 지난 주말은 최악이었다. 찬성 193명 반대 2명이라는 탄핵 결과가 나왔고,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재앙에 대해 홍일선 시인은 “탄핵! 이거 공상소설인가 소설가 밥줄 끊지 말라”고 일갈했다. 그렇지 않아도 3월의 하늘은 황사로 뒤덮여, 그야말로 SF소설이나 영화의 완벽한 배경이 되고 있다.

디스토피아적 상황임이 틀림없으니, 계속 SF적으로 말하자면 이 193명의 ‘어둠의 무리들’에 대적하는 빛은 13일의 토요일, 광화문에서 타올랐던 7만~8만여 개의 촛불이다. 그리하여 우린 SF에 등장하는 예언자처럼 말하고 싶을 것이다. 축복 있으라, 촛불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또한 저주 있으라. 파국을 초래한 그들에게! 그러나 광기에 광기로 싸울 수는 없는 법. 이성적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 다시 영화 비평의 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은 이 재앙 상황을 상당히 잘 설명해줄 수 있다. 과거형의 회고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사회나 시스템을 뒤집어엎어 불태운 그 다음에 희망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표면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의 정치 상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8㎜ 영화를 찍었던 그의 영화들에서 즉각적으로 관객들에게 튀어 올라오는 것은 포르노와 공포 영화와 같은 장르적 관행에서 인용된 뒤틀려진 형상들이다. <간다가와 음란전쟁>(1983)이나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1985)가 전자라면, <큐어>(1997)나 <도플갱어>(2003)가 후자의 예다. 또 그의 영화들은 역시 80년대 영화를 시작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나 <천국보다 낯선>의 짐 자무시처럼 고다르나 파스빈더 이후의 영화언어를 창안하고 있다. 포스트 68의 정치적 열정과 좌절이 사라진 시대,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다룬다. 그러나 특히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그 무표정 속에는 숨겨지고 체화된 역사적 정서에 대한 비판이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로 들어가는 문은 많겠지만, 내가 특별히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수치심의 문제다.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에선 여자의 수치심을 기계를 통해 측정하려는 실험까지 등장한다. 전후 일본을 “수치심의 문화”로 불렀던 인류학자는 루스 베네딕트였다. 이때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 시선에 대한 반응이다. 이는 서구의 “죄의식의 문화”와 짝을 이루게 된다. 그의 이러한 본질적 이원론은 비판을 받았지만. 일본 학자 우카이 사도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비서구인들도 바로 이러한 미국적 헤게모니가 낳은 문화적 이원론을 (비)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수치심의 문화라는 범주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타자의 시선 앞에서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거나 수치심의 문화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탄핵 사건을 구로사와 감독의 어법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소위 수치심 부재의 <국회 음란전쟁>이다. 탄핵을 다수당의 횡포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수치심 없는 행동이다. 결과는 <도레미파 시민들의 피가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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