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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2일부터 “매혹과 혼돈의 시대” 50년대 영화 13편 상영

핏빛 루주만큼 짙은 그녀들의 열망영화사가 이영일 선생은 50년대에 유행했던 애정극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져온 신파이고, 다른 하나는 50년대에 소개된 새로운 문화와 접목된 현대적인 감각의 ‘멜로드라마’이다. 사실, 감정의 끈에 매달려 눈물을 쏟아내는 신파와 우여곡절 많은 여인의 삶을 세련되고 과잉에 찬 세트로 멋들어지게 포장한 멜로드라마를 분리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전쟁으로 부족한 물자로 인해 영화의 품새가 조악할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50년대 멜로는 양식화된 세트와 조명기술을 통해 화면구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미학적인 발전과 함께 50년대 멜로드라마는 독특하면서도 대조적인 두 여인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아프레 겔”이라 불리던 전후파 여성들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서구문화를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관습에 저항했던 여성들이다. 그 반대축에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봉건적인 여인들이 있다. 신파극의 여주인공 전통에 기대어 운명의 질곡을 따라 흐느끼는 여인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키려 애쓰면서도 새로운 문화의 매혹적인 손짓을 거부할 수 없었던 당대 대중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들을 통해 되바라진 목소리로 구습에 저항하기도 하고, 구슬프게 목놓아 울기도 했던 멜로드라마야말로 “매혹과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매혹과 혼돈의 시대” 영화전은 올 11월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1950년대 극영화 프린트 중 필름상태가 좋은 작품들 13편을 상영하는 것으로 영화의 예술적 지위를 높인 한국영화 중흥기의 흐름을 짚어보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매혹과 혼돈의 시대 ” 50년대 멜로영화전> *상영일시 : 3월22일(월) - 27일(토) *상영장소 : 한국영상자료원 시사실 ‘봄’ *상영안내 : (02)521-3147 내선 1번 및 자료원 홈페이지(www.koreafilm.or.kr) *3월27일(토) 7시30분 “청춘쌍곡선” 상영 후,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 5, 금순아!”(김홍 준,2004)의 상영과 함께 김홍준 감독의 “청춘쌍곡선” 및 한국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관객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

▶한국영화 중흥기의 면모 보여줄 13편

<운명의 손> 포스터

<청춘쌍곡선> (한형모, 1956)과 <여사장>(한형모, 1959)

병원에 두 남자가 찾아왔다. 부잣집 남자는 너무 먹어서 위가 터질 지경이고, 가난한 남자는 너무 못 먹어서 위가 꺼질 지경이다. 의사의 처방은 서로 집을 바꾸어 살라는 것! 우리의 악극문화와 서양의 밴드문화가 어우러지고 있는 <청춘쌍곡선>은 빈부의 격차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던 당시를 풍자하고 있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가 <여사장>이다. 이기적이고 현대적인 문화를 즐기는 아프레 겔 여사장과 봉건적이면서도 줏대있는 남자사원간의 아옹다옹 사랑 이야기.

<운명의 손>(한형모, 1954)과 <순애보>(한형모, 1957)

한형모는 50년대 한국영화의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촬영감독으로 활동했던 그는 전쟁기간 동안 국방부 촬영대에서 기록영화를 찍었고, 그 숙련된 솜씨가 극영화로 이어졌다. <운명의 손>에서 보여주는 세련된 몽타주와 정교한 촬영기술은 그 결과물이라 하겠다. 북의 지령을 받은 여간첩과 남한의 방첩대장 사이의 사랑을 누아르적인 스타일로 표현하였다(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키스신에 주목하라). 반면, 박계주의 소설을 영화화한 <순애보>는 ‘목숨 거는 사랑’이라는 제목처럼 여러 갈래로 얽힌 처절한 사랑을 교과서적인 깔끔함으로 승부한다.

<지옥화>(신상옥, 1958)

늘 악녀역할을 하고 싶었던 한국적인 여인상의 대명사 최은희가 소원을 이룬 영화가 <지옥화>다. 깊게 팬 드레스를 입고 잘록한 허리를 요염하게 움직이며 뭇 사내를 유혹하는 악녀 쏘냐로 등장한 최은희는 욕망을 따라 남자를 파멸의 길로 안내하는 팜므파탈의 전형이다. 한 여자에게 빠진 형제의 운명이 전후 혼란기의 범죄와 얽혀들면서 스릴 넘치게 펼쳐진다.

<동심초>와 <자매의 화원>(신상옥, 1959)

한국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잘 만든 감독은 신상옥이었다. 그에게는 기술적인 완성도뿐만 아니라 당대 대중의 감성에 정확하게 파고드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50년대 그의 명성은 늘 당대 최고의 멜로드라마 대가 홍성기의 아성에 한발 뒤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홍성기와의 라이벌 관계는 오히려 신상옥표 멜로드라마를 더욱 완숙하게 만든 듯하다. 절제된 감성, 아름다운 영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놓고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다리기로 이어지는 탄탄한 이야기. 이 두편의 영화를 통해 애잔하면서도 화사한 신상옥 멜로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다.

<그 여자의 일생> 포스터

<자유결혼>(이병일, 1958)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자매의 결혼 모험담이다. 전통적인 중매결혼과 자유연애를 통한 연애결혼을 통해 변해가는 세상의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중매로 만나 연애로 결혼’하는 절충안을 내세우는 이 영화는 눈물과 웃음을 함께하며 변화란 삶의 한 부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 여자의 일생>(김한일, 1957)

신여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한 여자의 꿈이 남자들의 욕망에 의해 짓밟히게 된다는 이광수 소설의 신파적인 감성을 한국 영화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탁월한 미장센으로 정교하고 세련된 멜로로 변모시킨 수작이다. 실내장면뿐 아니라 실외장면까지도 세트를 사용한 이 영화의 양식적인 미학은 은은하면서도 감각적인 조명과 만나면서 더욱 돋보인다. 놓치면 후회할 멜로의 정수.

<모정>(양주남, 1958)

죽어가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생면부지의 아버지 집 앞에 버려진 7살배기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모정>은 50년대판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 할 수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 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이라면 <모정>은 한국전쟁이 낳은 비극이라는 점이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역배우이다. 당시 ‘천재소년’이라는 칭호를 안았던 안성기의 매력이 핵심 포인트!

<촌색씨>(박영환, 1958)

자상한 서울남자를 만나 서울로 시집간 시골처녀가 겪는 온갖 설움을 다룬 것이 <촌색씨>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눈물 짜는 신파로 오해하면 안 된다. 삼각, 사각으로 얽힌 애정관계를 풀어가는 묘미와 더불어 50년대 간판스타들의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1959)

“김지미는 한복을 입지 않은 최초의 멜로드라마 여주인공이었다.” 이영일 선생의 말이다. ‘고데’로 부풀린 머리와 양장을 차려입은 ‘스크린의 요정’ 김지미는 현대적인 여성상을 대표한다. 전쟁으로 죽은 줄만 알았던 약혼자가 돌아오면서 새로 만난 남자와 이별을 해야 했던 그녀의 운명은 과거와 현재의 충돌하는 가치관 사이에서 방황했던 당대의 운명과 겹쳐 있다.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

시골로 전근 온 선생님과 동네에서 악명 높은 문제아가 사회의 편견을 딛고 일어서 가족 같은 사랑을 피워간다는 계몽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영일 선생은 이 영화를 전후에 버려진 어린이들이 비참한 운명을 극복해가는 밝은 미래지향적인 영화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