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집사람’이고, 남자는 ‘바깥양반’이라고 부른다. 수십만년의 인류 진화 과정을 통해서 여자는 집안을 책임지는 ‘집사람’이 됐고, 남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실세를 가진 ‘바깥양반’이 되면서 여자는 집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무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오늘날 고질적인 사회적 불평등을 감수하고 살아가야 하는 슬픈 존재가 되고 말았다. 여자들이 집안일에 일생을 헌신하는 동안 남자들은 정치, 경제, 종교, 교육, 군사, 역사를 장악하고 부계사회를 제도화하면서 혈통에 권리까지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한 집안의 족보는 물론이고 재산도 아버지에서 아들로 남자들끼리 물려주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세상은 남성들의 것이며 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차라리 한채의 집, 그 이상의 의미도, 권리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여자가 ‘집사람’으로 사회적 지위가 퇴화하게 된 이유는 모두 ‘내 새끼’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알다시피, 생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포유류의 새끼들은 어미의 새끼이다. 특히 인간은 배란기나 발정기가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남성이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수정이 되므로 일부일처, 혹은 일부다처제가 아닌 경우에 인간 수컷은 자기자식을 확신할 어떤 명확한 근거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동물의 세계에서 양육기간은 지나치게 길다. 야생의 자연환경에서는 십년 이상, 오늘날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의 양육기간은 평균 30년까지 걸린다. 이렇게 긴 양육기간을 가진 상태로는 수렵을 하던 원시시대나 지금의 산업사회에서나 어미 혼자서 절대로 새끼를 기를 수 없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과 새끼의 부양을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어 ‘이 새끼는 당신 자식이 분명합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부일처제, 혹은 일부다처제까지 동의했고, 모든 사회적 바깥활동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양육을 책임져주는 한 남성에 대한 정조의 알리바이이다. 여성은 이렇게 ‘집사람’이 됐다.
오늘날 ‘양성평등’ 요구에 대해 여성에게 몇 가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해주는 것은 생색에 불과하다. 남성은 이기적이다. 새끼에 대한 희생보다 제 개인의 행복추구가 우선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여성이 자식을 위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때 남성은 당대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양육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정이라는 개인집단과 성을 초월한 사회적 시스템의 도입을 요구해야 한다. 그 어느 쪽도, ‘집사람’도 아니고 ‘바깥양반’도 아닌 것이 평등한 성의 시작이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