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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청춘 스케치 [4] - 연출부 이광재
정진환 오정연 2004-04-13

최고령의 딱딱이가 몸부림치면 연출부 이광재

이광재(31)씨는 <내남자의 로맨스>에 합류하기 전, 열 군데도 넘는 영화사에서 면접을 봤다. 열번이 넘는 거절의 이유는 그에게 영화 관련 경력이 전혀 없고 나이도 적지 않다는 것. 지금도 연출부 안에서 그보다 어린 사람은 없다. 연출부 막내가 담당하는 딱딱이(슬레이트)를 치는 그에게,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형이 아마 우리나라 최고령의 딱딱이일 것”이라고 했던 말이 폐부를 찔렀지만, 그 표현은 지금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임을 이광재씨는 알고 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계속했지만, 집단생활이 싫어서 연출부를 기피했다는 그가 이제 와선 연출부를 안 했더라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영화제작의 과정을 배우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자기만의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다는 이광재씨. 그의 휴대폰 첫 화면에는 “나는 잘났다”고 쓰여 있다.

-01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다가 낙방했다. 이듬해,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면서도 영화와 관련된 전공을 택한다는 게 국문과였다. 시나리오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웃음) 대학 졸업 뒤, 시나리오만 잘 쓰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시나리오 공모에 여러 번 응모했지만 다 떨어졌다. 호구지책으로 국어강사를 했는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식지 않았다. 그제야 장편영화 연출부 자리 알아보면서 단편영화 제작부하고, ‘한겨레 영화제작학교’ 다니고, 그때 생긴 인맥으로 연출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02 일을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점은.

=영화인들은 다들 독특하고 기이할 줄 알았는데 평범한 사회인들이었다. 영화제작 과정도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졌고. 잘난 척하거나 예술가연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없어서 좋다.

-03 일하면서 욕먹었던 일이나 칭찬받았던 일은.

=칭찬받은 거라곤, 술 잘먹는다, 정도? (웃음) 크게 욕먹은 적은 없지만 워드로 표작업 하는 법을 자꾸 물어보니까 사람들이 싫어하더라. 게다가 뭐든지 벼락치기로 처리하는 버릇이 있는데, 미리 준비 안 해놨다고 많이 혼난다. 현장에서는 좀 뛰어다니라는 얘기도 듣고.

-04 친구들이 내가 하는 일을 부러워할 때.

=생활을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한 친구들이 그나마 생활고까지 겪을 때 그런 말을 하더라. 그래도 넌 좋아하는 일이나 하지, 라면서.

-05 친구들이나 가족이 쯔쯔 혀를 찰 때.

=친구들이 나에게 별 신경을 안 쓰는지 ‘넌 잘하겠지, 뭐’ 이런 식이다. 뒤늦게 시작한 일이라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있음을 신경쓰는지, 주위에서는 별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눈치다.

-06 그때 엎어버리고 싶었다.

=별로 그런 적 없는데. 나이가 많다보니 조연출도 나한테는 한번쯤 참고 넘어가는 것 같다.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 없다.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여자와 드디어 사귀고 있는데, 상대방 이빨에 고춧가루가 꼈다고 데이트를 멈출 수는 없지 않나

-07 힘들 때 위로하는 방법은.

=어릴 때부터 같이 영화를 하자고 말한 친구가 있다. 힘들 때 전화하면 “넌 할 수 있어, 게으름만 좀 덜 피우면”이라면서 위로해준다. (웃음) 개인적으로 늘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08 혹시 벌써 직업병이.

=영화 볼 때, 자꾸 소품에 눈이 간다. ‘야, 저걸 어디서 찾았을까’ 이러면서. 영화 끝나고 크레딧도 굉장히 열심히 보게 됐다.

-09 로또에 당첨돼도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인가.

=당첨금으로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 실패하면 남은 돈으로 또 만들고…. (로또 당첨액이 수백억원이 아닌 수십억원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앗, 그렇다면 한편의 실패작만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일단 연출부를 하면서 경험을 쌓아야지. 뭐든 순리대로 해야 한다. (웃음)

-10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상은.

=당연히 감독이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공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