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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청춘 스케치 [10] - 미술팀 최윤영
사진 정진환박혜명 2004-04-13

뭘 봐도 '저건 어디에 쓰면'이 절로 미술팀 최윤영

사람 일에 귀천은 없다. 그래도 프랑스에서 우아하게 금속공예를 전공한 사람이 한국의 거칠고 험난한 영화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면 사정이 궁금한 것도 당연하다.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스탭 최윤영(25)씨는, 원래 보석디자이너로 취직했다가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일러스트레이션만 하고 있는 게 싫어져서 회사를 관뒀다 한다. 1년 만에. 영화미술팀 합류가 결정된 뒤 그의 두달은, 특히 12월은 악몽이었다. 공간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학원과 학원을 오갔다. 점심시간 포함해 이동시간 20분. 집에 돌아와선 쌓인 숙제가 휴식보다 먼저였다. 남자친구는 “여자가 그런 일 하면 드세진다”며 싫어했다. 그 사람과는 결혼 얘기도 오갔었는데, 헤어졌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버텨낸 막내 최윤영씨는, 크랭크인 들어간 지 한달도 안 된 영화의 미술쪽 완성도를 운운할 만큼 진지하고 당찬 새내기다.

-01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프랑스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고, 돌아와서 보석디자인회사에 취업했다가 1년 다니고 그만뒀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다가 ‘소품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알게 됐는데 지금의 미술감독님을 그때 당시 친분이 닿아서 만나게 됐다. 그분이 나에게 ‘소품쪽에서 일하지 말고 차라리 좀더 공부를 해서 미술팀에 들어오라’고 하셔서 두달간 학원 열심히 다녔다. 설 연휴 끝나고 바로 출근 시작했다.

-02 일을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점은.

=크랭크인 전에 감독님이 다른 영화현장에 한번 나와보라고 해서 나갔는데 거기 스탭들이 다들 “진짜로 할 거냐. 후회한다. 진짜 힘들다”면서 뜯어말렸다. 그땐 ‘대체 얼마나 힘들기에 저러나’ 싶었다. 그냥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근데 막상 현장에 나와보니까 너무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바쁠 줄은 상상도 못했다.

-03 일하면서 욕먹었던 일이나 칭찬받았던 일은.

=미술 감독님이 패브릭 일체를 날 믿고 맡기셨더랬다. 식탁보, 쿠션, 침대시트 등등 일일이 치수를 재서 내 취향으로 주문했다. 어떤 걸 주문했는지 미리 찍어서 감독님께 보여드릴 땐 오케이도 받았다. 근데 막상 물건이 나오고나니까 화면상 너무 튀고 영화 컨셉과도 안 어울렸다. 한두개만 빼놓고 다 걷어냈다. 다시 주문하는 건 시간이 촉박해서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집에 있는 내 방 물건들을 갖다가 대체했다. 나중에 감독님 말씀이 그때 그 공간에 딱 들어섰을 때 정말 찍기 싫었다고 하시더라. 칭찬은 아니지만 뿌듯했던 일은, 소품으로 십자가 목걸이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직접 디자인한 일이다. 감독님은 2∼3개만 해오랬는데 20개쯤 해가서 보여드렸다. 그중에 선택받은 디자인이 지금 제작 들어가 있다.

-04 친구들이 내가 하는 일을 부러워할 때.

=미술이나 디자인 계통 친구들은 당연히 부러워한다. 해보고 싶어도 연이 안 닿으면 기회가 잘 없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시각디자인과 나온 친구들은 특히나 부러워한다.

-05 친구들이나 가족이 쯔쯔 혀를 찰 때.

=혀를 차는 건 아니고, 친구들은 이 일이 몸 버리고 돈 못 번다고, 나보고 사치부린다고 그런다. (웃음) 가족들은 몸이 힘들까 걱정을 많이 한다.

-06 그때 엎어버리고 싶었다.

=진짜로 엎었었다. 같은 팀에 나랑 똑같은 막내인데 나보다 네살 많은 오빠가 사람을 자꾸 약올려서 크게 화낸 적이 있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옆에 와서 ‘넌 그것도 모르냐?’ 그러면서 자긴 안다는 식으로 말하고, 가르쳐달라고 하면 ‘나도 모르는데∼’ 이런 식이었다. 자꾸 그러니까 나도 쌓여서 나중에 폭발했다. 너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 가르쳐줄 것도 아니면서! 그때 분위기 진짜 싸∼했다. 같은 막내끼리 자기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나한테 명령조로 말하는 건 정말 싫다.

-07 힘들 때 위로하는 방법은.

=정말 힘들 때가 있긴 하지만, 현장에서 나만 힘든 것도 아니고 다들 똑같이 힘든데 내색 하나 안 하니까 내가 아직 멀었구나, 생각한다.

-08 혹시 벌써 직업병이.

=모든 종류의 공간, 소품의 이미지 등이 머릿속에 꽉 차 있으니까 뭘 봐도 ‘저건 어디에 쓰면 되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아까도 시장 지나가다 새장을 하나 봤는데, 아 저건 수연이 방에 들어갈 새장으로 딱이다, 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 준비한 새장이 있었는데도 하나 더 사버렸다.

-09 로또에 당첨돼도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인가.

=당연하다. 더 맘먹고 일할 수 있다. 돈도 있겠다, 제작자한테 돈 좀 주고 예산도 늘려서 내가 원하는 컨셉대로 가면 되니까. (웃음) 제작부는 미술팀에 너무 짜게 군다. 돈이 부족하니까 해보고 싶은 대로 다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10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상은.

=미술감독까지 가야지. 영화에서 미술은 상당히 큰 부분인데 아직도 제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것 같다. 제작팀에서 지원도 잘 안 해주고. 내가 미술감독을 하면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미술쪽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좋겠다. 29살이나 30살쯤엔 전공 살려서 파인주어리숍도 차리고 싶다. 얘기 들으니까 미술감독 중에도 일을 두개씩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