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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여성에게조차 저절로 오지 않는다

심영섭의 반론을 읽었다(<씨네21> 445호 참조). 그녀는 글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반여성주의는 김기덕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의 전 역사에, 나를 길러준 전 가족 안에, 지금도 이 사회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으로 나는 피해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 경험이 있다. 나의 페미니즘은 바로 그런 삶 속에서 태동한 것이다.” 내 글의 반론이지만, 참으로 의미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심영섭뿐이겠는가. 이 땅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고통을 당하는 여성들이.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는 있다. 지금과 같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특히 남성사회의 일원인 나는 반성을 한다. 때문에 나 역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속성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심영섭의 글을 읽으면서 대단히 절망했다. 심영섭은 나에게 “제발 대학원으로 돌아가서 페미니즘 이론 공부를 제대로 하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살아가면서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번씩 절감하고 있는 나에게 좋은 충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영섭은 이후 뭐라고 했는가. 페미니즘을 “당신처럼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페미니즘은 “나의 삶”이라고 단정했다. 결국 심영섭은 체험하지 않고 머리로 공부하는 남성은 도저히 페미니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심영섭은 왜 나더러 학교에 돌아가 페미니즘 이론 공부를 제대로 하라고 했는가? 체험할 수 없는 남성이라면 공부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심영섭은 남성과 여성을 갈라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가령 그녀는 “김기덕 감독이 가만히 있었는데 여성 평론가들이 비평 글을 썼는가?”라며 ‘여성’을 강조한다. 나는 내 글에서 ‘여성 평론가’라는 말을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고통을 논의의 시작으로 삼지만 여성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심영섭은 왜 이렇게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켜놓고 논의를 전개하려 하는가? <씨네21> 340호에서 심영섭은 “세상에 재미없는 게 남자는 남자편 여자는 여자편 드는 게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 그동안 생각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가?

생물학적 성별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심영섭은 이걸 알고 있는가? 만약 그녀의 말이 성립한다면, 더이상 심영섭은 김기덕의 영화를 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왜냐고? 그것은 그녀가 체험하지 못한 ‘남성’ 김기덕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영섭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체험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 페미니즘이 뭔가? 남성, 여성 갈라놓고 싸우자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나는 싸우자고 논쟁을 시작한 게 아니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을 토대로 남성과 여성을 갈라놓지 않는다. 만약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성을 토대로 서로 갈라져 싸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키울 뿐이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성의 분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명확한 한계가 있는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 구조를 깨자는 것이 페미니즘 아닌가. 그런데 심영섭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놓고 자신은 여성의 범주 안에 들어가 내 글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 이제 심영섭이 제기한 문제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녀는 먼저 내가 제기한 폭력적인 글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 지적에 대해 심영섭은 “마음에 들지 않는 단 한 단락만을 이용하여 돌팔매질을 하는, 파울 플레이 메타 비평”이라고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 답답했다. 그래서 심영섭이 말한 대로 다시 한번 그 글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읽고 나서도 나는 한 단락만 이용해서 돌팔매질을 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심영섭은 그 글에서 그토록 길게, 그리고 교묘하게, 그것도 가장 중요한 후반부에 문제의 ‘정신과 환자 운운하는’ 그 문장을 위치시킴으로써 김기덕을 정신과 환자처럼 진단했다. 설령 그가 느낀 김기덕 감독의 에너지가 증오라고 해도, 단지 그 ‘사실’을 비평적으로 밝혀내는 것에 그쳐야지, 임상심리의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감독을 정신과 환자 운운하는 것은 명백한 오버이며 인격모독이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김기덕 감독에 대한 심영섭 비평의 에너지가 증오처럼 보인다.

그리고 심영섭은 곧이어 “강성률씨의 이러한 비판은 페미니즘 비평이 누구를 인신공격하거나 <섬> 같은 영화에 창녀가 몇명이나 나오나 세어보는 그런 식의 그런 비평은 아닌가 하는 대중의 오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나를 깎아내리기에 바쁘다. 정말 이런 식의 비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문제삼은 것은 심영섭이 행하는 폭력적 글쓰기였지 “창녀가 몇명이나 나오나 세어보는” 그런 비평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않는가. 그런데도 심영섭은 의도적으로 내 논의를 흐트려놓으려고 이런 식의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내가 제기한 폭력적 글쓰기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또한 심영섭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 자신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백상빈의 “그 글은 심영섭에 대한 정신분석이지 심영섭의 <섬>에 대한 메타 비평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 황당했다. 어떻게 그 글이 심영섭에 대한 정신분석이 되는가?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심영섭의 <섬>에 관한, 동종의 사람이 행한 메타 비평이었다. 설령 한발 양보해 그것이 심영섭에 대한 정신분석이라고 하더라도, 그 글은 <섬>이라는 영화평론을 쓴 영화평론가 심영섭에 관해, 그 글과 더불어 분석한 것 아닌가?

나는 여기서 비평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비판에 대해 반론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비평가라면 자신의 글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한다. 내가 알기로는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제외하면, 심영섭은 자신의 글에 대한 반론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심영섭의 비판을 받은 구보씨가 반론을 했을 때도 그녀는 재반론을 하지 않았다. 이번 논쟁에서의 그녀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 대해서도 그녀는 이미 재반론을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아니, 내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인가? 이것은 명백한 비평가의 책임회피이며, 불성실한 태도이다.

여성적 정체성/시선 연구의 심화가 필요하다

이제부터 내가 제기한 문제를 짚어볼 차례이다. 폭력적 글쓰기와 더불어 내가 제기한 문제는 페미니즘 비평이 말하는 주체적 여성(또는 여성적 주체)에 대한 정의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것과 페미니즘 비평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심영섭은 내가 제기한 첫째 문제에 대해 답은 하지 않고 그 대신 내가 예로 든 것을 비판했다. <피아노>에 대해 그녀는 “제인 캠피온은 이러한 생각이 여성에게 인간에게 얼마나 폭압적인가를 드러내는 장치로 에이다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또 그녀는 “동일한 행위도 역사적 시대적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동일한 행위도 역사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나 역시 <피아노>의 그 행위가 심영섭이 말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영섭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정말 ‘여성에게 폭압적인가를 드러내는 장치’와 ‘여성에게 폭압적인 장치’를 단번에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에 따라 다르며, 상황에, 감독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심영섭의 말을 빌리자면, 비평가들은 자신의 주관이 공정하다고 믿을 뿐이다. 난 페미니즘 비평이 정말로 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 즉 주체적 여성(또는 여성적 주체)에 대한 논의를 좀더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정반대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심영섭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김기덕 ‘연구’를 집중적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지금까지 행해온 짧은 글로는 김기덕 비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심영섭은 <집으로…>를 논했다. 먼저 논의를 명확히 하자. 나는 페미니즘 평론가가 <집으로…>를 극찬했지, “<집으로…>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극찬했”다고 한 적이 없다. 심영섭을 비롯한 일련의 페미니즘 평자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평했다고 한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집니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심영섭 아니던가. 심영섭은 이 영화를 두고, “우리가 어렸을 때 느끼고 혹은 바랐던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을 그러나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욕망을 할머니의 품속에서 찾게 하는 데 감동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모든 것을 덮어주고 항상 내편이 되는 사람을 찾은 듯싶은 기쁨, 어떤 원형적인 힘이 관객을 끌어모은 것은 아니냔 말”이라고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로 의구심이 들었다. 심영섭이 논한 대로 영화를 보는 것은 다름 아닌 남성의 시각이다. 할머니를 인고의 대상으로 상대화해 놓는 ‘못된’(?) 손자의 시선이다. 적어도 페미니즘 평자라면 여성의 시각, 즉 인고의 할머니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삶이 페미니즘’이라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기본적인 페미니즘 마인드는 있어야 한다. 세상의 가장 큰 차별이 남성에 의한 여성 차별이라는 시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놓칠 수 있는가? <집으로…>를 칭찬하더라도 ‘페미니스트’ 유지나는 “아무리 희생적인 어머니, 인고의 어머니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허상이라도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어머니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다”(유지나,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생각의 나무, 2002년, 18쪽)고 했다. 뭔가 다르지 않은가? 칭찬하더라도 페미니즘 시각으로 꼼꼼히 따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심영섭이 자유롭고 싶다며, “지금처럼 장르가 보이면 장르로 가고, 여성이 보이면 페미니즘으로 가고, 감독이 보이면 작가주의로” 간다는 것도 그렇다. 페미니즘과 장르가, 페미니즘과 작가주의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심영섭이 행하는 김기덕 비평이 바로 페미니즘 작가주의 비평이다. 페미니스트들이 행하는 멜로드라마 연구가 페미니즘 멜로드라마 연구이다. 어떻게 심영섭은 이것을 두부 모 자르듯이 분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삶이 페미니즘’이라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기본적인 페미니즘 마인드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심영섭은 <집으로…>를 두고 “왜 재미없게 페미니즘의 잣대로 논의되어져야 하는가”라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한다. 내가 여기서 눈여겨본 것은 “재미없게”라는 단어이다. 자칭 페미니즘 평자라는 사람이, 페미니즘이 자신의 삶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페니미즘을 두고 감히 “재미없게”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페미니즘 평자들이 김기덕만 집중 공격하고 다른 감독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런데 심영섭은 비평은 공정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내가 제일 황당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내가 제기한 문제는 페미니즘 시각으로 비평을 한다면 적어도 영화를 볼 때 그 잣대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복잡미묘한 세상의 모순을 제대로 직시할 것 아닌가. 적어도 페미니즘 시각으로 영화를 본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심영섭은 갑자기 비평은 공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페미니즘 비평이라는 방법론과 비평이라는 일반론이 어떻게 동급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심영섭은 글 서두에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회의 모순이지, 그 모순 속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혹은 비평)이어서는 안 된다”는 푸코의 말을 인용하고, 이후 “세상은 불공평한데 페미니즘 비평만 공평해야 하나”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그녀는 세상이 모순되기 때문에 자신의 비평이 공평할 필요가 없다는 장막을 치고 있는 셈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 만약 그 말이 맞다면, 김기덕 영화 역시 비판받을 필요가 없다. 김기덕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비판해야 하지 않은가.

페미니즘은 학문, 윤리, 실천의 영역

나는 심영섭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이 땅의 모든 여성은 페미니스트이다. 이 땅에 살면서 차별을 느끼지 않은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녀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미 생활이 페니미즘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가부장적 이분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페미니즘이 단지 삶의 한 부분일 뿐인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절대 인간 해방을 이룰 수 없다. 페미니즘은 학문의 영역이면서 윤리의 입장이고 실천의 운동이다. 공고한 마초 가부장의 틀을 깨는 이론적 틀이 있어야 하고, 그런 틀을 깨기 위해 싸워야 하며,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는 마초의 행동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밝히는 이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심영섭은 나에게는 대학원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라면서 정작 자신은 “학교에서 여성주의나 영화에 관한 수업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심영섭이야말로 대학원으로 돌아가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라고 진정으로 권하고 싶다. 모든 노동자가 마르크시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의식화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같은 원리로 삶이 곧 학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심영섭은 “삶 속에서 태동한” 페미니즘을 이론과 실천의 영역으로 심화해 철저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차별이 없는 세상이 빨리 오지 않겠는가.

내가 처음 비판한 것은 페미니즘 평자들의 폭력적 글쓰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 페미니즘이 말하는 주체적 여성(또는 여성적 주체)이 살아 있는 영화에 관한 정의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것, 그리고 페미니즘의 잣대가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만 컸던 심영섭은 그 어느 것도 답을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