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선택! 2004 전주국제영화제 - [2] 쿠바영화 특별전
홍성남(평론가) 2004-04-21

알레아, 솔라스의 ‘혁명영화’와의 조우

영화 성찬2 - 쿠바영화 특별전

1960년대 브라질에서 글라우버 로샤가 ‘굶주림의 미학’을 주창했다면 비슷한 시기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인 쿠바에서는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자라는 영화감독이 ‘불완전한 영화’를 새로운 영화의 시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에스피노자의 이 개념은 당연히, 당시의 쿠바처럼 영화적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나라에서 기술적·예술적 완성도를 지향하는 영화적 시도란 소모적일 뿐 아니라 그릇된 것이라는 생각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영화’가 단지 당대의 물질적 제한에만 대응하는 영화, 그래서 부주의하게 혹은 볼품없이 만들어도 되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건 분명 에스피노자의 생각을 오해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나중에 그는 자신이 의미하는 게 새로운 영화문화의 전개에도 동화하고 그것에 관심을 갖는 영화라는 점을 재차 밝혀야만 했다. 즉 필요에 의해 그 어떤 양식이나 장르를 활용하는 절충주의의 방법을 따르지만 그것이 하나의 ‘미학’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불완전한 영화’가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의 요구에 응하는 유의 것임은 물론 첫 번째 전제사항이었다. 정리하자면, 사회 변혁에 ‘참여’한다는 대의를 위해 다양한 영화적 자원들을 활용해내면서 그럼으로써 고루한 영화적 양식으로부터의 탈피마저 꾀하는 영화, 그것이 에스피노자가 그리고 있던 ‘불완전한 영화’였을 것이다. 60년대의 쿠바는 실제로 바로 그런 불완전한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어낸 나라였다.

‘불완전한’ 새로운 영화들의 탄생

영화사는 쿠바를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국가적인 규모의 새로운 영화문화를 보여준 나라라고 쓰고 있다. 쿠바의 영화는 1959년 완수된 혁명과 함께 실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이 같은 해 혁명 정부에 의해 설립된 쿠바영화예술산업기구(ICAIC)였다. 이 기구는 쿠바의 영화제작을 늘렸을 뿐 아니라 창작자들에게 스타일상의 도그마를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예술적 성공을 가져오는 데도 도움을 준 것이다.

흥미롭게도, ICAIC의 창립 멤버였으며 그 기구의 뉴스릴 부문을 이끌었던 산티아고 알바레즈는 쿠바 영화사상 미학적으로 가장 대담했던 영화감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아마도 그는 에스피노자의 ‘불완전한 영화’를 가장 잘 실현해낸 영화감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알바레즈가 한 말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이런 것이 있다. “두장의 사진, 음악, 그리고 무비올라를 내게 줘보라. 그럼 당신에게 영화 한편을 만들어 보이겠다.” 작업시간도, 자원도 많이 주어지지 못한 알바레즈는 그런 자신의 힘든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가면서 영화를 만들어갔다. 그는 자기 주위에 주어진 것이면 무엇이든 영화 속에 끌고 왔다. 뉴스릴의 이미지들, 사진들, 잡지들 등등을 대담하게 이어붙이고 거기에 생동감 있는 텍스트나 음악을 삽입하면 한편의 놀라운 몽타주 작품이 탄생하곤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혁명이, 전쟁이 자신을 영화감독이 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던 만큼 알바레즈는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다큐멘터리스트였다. 그의 대표작들인 <지금>(Now, 1965년, 6분), 〈L.B.J>(1968년, 18분), 〈79 봄들>(79 primaveras, 1969년, 25분)은 각각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 미국의 정치·사회적 부패,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를 다룬 영화들이다.

<저개발의 기억>

알바레즈를 먼저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 쿠바 출신의 영화감독들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는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일 것이다. 알레아에 대한 비평서를 쓴 폴 슈뢰더라는 비평가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알레아의 영화들을 보고 연구한다는 것은 쿠바의 가장 중요하고 일관되게 비판적인 한 영화감독의 눈을 통해 혁명 쿠바를 보는 것이다.” 알레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쿠바 영화사의 대표작이기도 한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 1968년, 104분)은 슈뢰더의 이 언급을 잘 예증해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피그스만 해안 침공이 있던 1961년에서 미사일 위기가 발발한 그 다음해까지의 시간을, 중년의 한 부르주아 남자의 발걸음으로 통과해간다. 혁명이 일어나자 부모와 아내마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지만 주인공 세르지오는 쿠바에 남기로 결정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딱히 모국을 사랑하거나 혁명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쿠바에서 보는 것은 온통 ‘저개발’의 증거들뿐이다. 옛 쿠바가 새로운 쿠바로 바뀌어가는 미로의 지대에 소외된 (혹은 스스로 소외를 택한) 인물의 멀뚱한 시선이 겹쳐지면서 텍스트는 좀더 미묘해진다.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자면 <저개발의 기억>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닮은 데가 있지만 스타일 면에서는 장 뤽 고다르를 연상케 하는 영화다.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공존하는 형식은 이것을 재현의 정치에 대한 탐구로 보게도 만들어준다.

<딸기와 초콜렛>

<저개발의 기억>은 분명 사적인 이야기와 정치적인 담론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알레아가 그것보다 훨씬 뒤에 후안 카를로스 타비오와 함께 만든 <딸기와 초콜렛>(Fresa y chocolate, 1993년, 110분)은 전작과 유사한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는 두 젊은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당의 이념을 충실히 따르는 대학생 남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술을 사랑하는 게이 청년이다. 영화는 전자가 후자에게 점점 이끌리는 과정, 혹은 두 사람이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꼼꼼하게 그리면서 그 이면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너그럽지 못한 사회의 모습이 슬그머니 배어나오게 만든다.

<딸기와 초콜렛>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된 첫 번째 쿠바영화가 됨으로써 꽤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명성이나 영화사에서의 위치라는 측면에서 이보다 젊은 영화인 <저개발의 기억>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진 못한다.

<루시아>

그런데 쿠바영화의 대표작인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바로 그해에 비록 명성에선 그것에 뒤져도 야심과 중요성에 있어서는 결코 밀리진 않는 한편의 쿠바영화가 나왔으니 그것이 움베르토 솔라스 감독의 <루시아>(Lucia, 160분)이다. 영화사가 로버트 스클라의 말을 빌리면 <루시아>는 규모, 다양성, 에너지로 인해 정치 영화의 분명한 한 성취물로 남아 있는 그런 영화이다. 영화는 우선 그 스토리가 담아내고자 하는 광대한 영토부터가 대단한 야심작임을 느끼게 만든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각각 스페인 식민주의와의 투쟁이 벌어지는 1895년, 반독재 투쟁이 있었던 1932년, 카스트로 혁명 이후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각 시대를 살았던 세명의 ‘루시아’가 어떤 삶의 행로를 따라가는가를 지켜본다. 그리고는 스크린 위에 ‘역사’(쿠바의 역사, 쿠바 여성의 역사)를 담아내려고 한다. 한편 <루시아>가 거둔 성취는 몇 가지의 영화적 스타일들, 이를테면 몽타주, 핸드헬드 카메라의 움직임, 바로크적인 스타일 같은 것들을 역사적 멜로드라마 안에 무리없이 통합해내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알레아, 솔라스, 알바레즈 같은 이들이 거둔 영화적 성취는 아주 눈부신 것이었지만 그 같은 성취들이 하나의 집합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룬 상태, 즉 쿠바영화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쿠바영화는 양적으로도, 그리고 질적으로도 전반적인 하강의 경로를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흥미로운 영화가 안 나온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휘파람>

최근의 쿠바영화 가운데 페르난도 페레즈가 1998년에 만든 <휘파람>(La Vida es silbar, 106분)은 꽤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이것은 또한 그해 만들어진 유일한 쿠바영화이기도 했다). 영화는 마치 천리안을 가진 듯한 내레이터 소녀를 중심으로 세 인물, 즉 춤에 대해서, 그리고 남자에 대해서 아주 열정적인 댄서 마리아나,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을 해대는 중년 여성 줄리아, 딱히 할 일이 거의 없어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 음악가 엘피디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판타지와 리얼리즘이 융합한 그 (사랑) 이야기들 속에서 쿠바는 이제 정치의 장소라기보다는 따라잡기 쉽지 않은 운명 속으로 모습을 감춘, 그래서 좀더 매혹적인 삶의 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첫 대사는 “쿠바는 어디 있지?”였다. 아무래도 우리는 여기서 현재의 쿠바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파악하려 애쓰는지 그 한 가지 실례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