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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4 전주국제영화제 - [3] 일본 예술영화 ATG회고전

기발함과 모험 ‘숨은 소리’ 찾기

영화 성찬3 - ATG 회고전으로 보는 일본 예술영화의 힘

1961년에 발족된 일본의 ATG(Art Theater Guild)는 ‘예술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일본 전역에서 10여개의 예술영화전용관을 확보하고, 그 영화관에서 상영할 영화를 직접 만들기 위해 조직된 ATG는 일본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양산했고, 다양한 성향을 가진 감독들이 메이저 영화사에서 시도할 수 없는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 기회를 제공하였다. ATG는 86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고, 참가한 감독의 성향에 따라 크게 3기로 구분된다. 메이저 영화사가 거부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 ATG는 감독의 자유로운 창작욕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일본 예술영화의 수원지라고 할 수 있다. 1, 2기는 메이저와 불화를 겪은 감독, 아예 접촉조차 하지 않았던 예술영화 감독들이 활동한 시기다. 반면 3기는 기존의 영화나 TV에서는 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시도해본 감독들이 많았다. 80년대 뉴웨이브의 시작은 ATG였다.

메이저에선 결코 만들 수 없는, 만들어지지 않는 자유

1961년 당시 유럽에서 좋은 작품을 사려면, 반드시 다른 영화를 끼워서 사야만 했다. ATG의 창립자 중 하나인 가와사키 나가마사는 예술영화를 함께 가지고 왔고, 그 영화들을 상영하기 위하여 도호영화사의 모리 이와오와 함께 ATG를 세워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외국의 예술영화와 함께 상영할 영화를 조달하기 위해, ATG는 일본의 감독들이 만든 예술영화를 제작하며 1기가 시작되었다.

2기의 시작은 일본 메이저 스튜디오의 몰락과 함께 도래했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실험적인 영화, 작가의 ‘낙인’이 명확하게 들어 있는 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살아 있는 낙인>을 만든 스즈키 세이준이 해고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후 이미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었던 오시마 나기사는 물론 시노다 마사히로 등 많은 감독들이 메이저 영화사를 나와 독립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2기에 돌입한 ATG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교수형>(1968)을 시작으로, ATG와 각 영화사가 영화제작비를 반씩 내는 형태로 ‘1천만엔 영화’ 제작에 들어간다. 1천만엔 영화의 시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 저예산영화의 출발점이자 전형이 되었다. 또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만들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1979년 프로듀서인 사사키 시로가 사장으로 취임하며 시작된 3기는 자주영화를 만들던 감독이나 재능 있는 조감독들을 기용하여,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던 시기다. “70년대 말에는 젊고 재능있는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어도 보여줄 공간이 없었다. 나는 8mm, 16mm 자주영화를 찍던 젊은 감독에게 35mm를 찍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핑크영화의 감독들. 여기서 다카하시 반메이, 이즈쓰 가즈유키를 발견했다. 다음으로는 당시 유일하게 촬영소 시스템이 남아 있던 닛카쓰. 수많은 조감독들 중에서 네기시 치키타로, 이케다 도시하루 등을 발견했다.” 당시 ATG는 모든 영화가 최소한의 제작비로 최대의 표현을 끌어내는 시도를 했다. “영화 한편에 투입되는 예산은 한 가지에만 집중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파도소리>(1980)의 경우 조명에 베테랑 조명기사인 오카모토 겐이치를 기용했고, <가족게임>(1983)의 경우는 딱 한 세트만은 스테이지를 짜도 좋다… 는 식으로 말이다. 작품에 따라서, 딱 하나의 포인트가 확실히 결정되어 있었다. 그외에는 돈이 없으니까 모두들 지혜를 짜서 어떻게든 만들어냈다.”

“그들의 젊음과 자유가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 싶다. 그리고 모두가 젊고 어렸지만 생각만큼은 깊었다는 것을 다들 느꼈으면 좋겠다. 그저 감각의 감성으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 생각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의 깊이와 중요도. 그것을 느낀다면, 지금의 일본영화에 무엇이 이어져나올 것인지. 거꾸로 ATG 영화의 무엇이 재미있었는지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사키 지로의 말처럼, 전주영화제에서 만나게 되는 11편의 ATG 영화는 저예산의 예술영화란 무엇인지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도발적이고, 젊음의 활력이 넘치는 3기의 영화가 조금밖에 없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윤복이의 일기> Diary of Younbogi

감독 오시마 나기사/ 일본/ 1965년/ 25분

쇼치쿠를 나온 오시마 나기사는 독립제작사인 창조사를 설립하여 야심적인 작품들에 도전한다. 오시마 나기사는 한국 여행 중에 찍은 소년 소녀의 스틸 사진을 이용하여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스틸 사진의 몽타주 위로, 한 소년의 수기인 <윤복이의 일기>가 낭독된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병든 아버지를 위하여 10살의 윤복이는 세살 아래 여동생 순아와 함께 거리에서 껌을 팔며 살아간다. 윤복이는 공무원의 단속에 걸려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가 도망치고, 순아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난다.

<닌자 무예장> Band of Ninja

감독 오시마 나기사/ 일본/ 1967년/ 111분

당시 학생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시라토 산페이의 만화를 각색했다. <윤복이의 일기>에 쓰였던 정지화면을 몽타주시키는 기법은 만화의 컷을 스틸로 사용한 <닌자 무예장>에서 효과적으로 쓰인다. 일본의 전국시대, 후시카게의 성주 유키 미츠하루는 신하인 사카가미 슈젠에게 살해된다. 겨우 살아난 아들 주타로는 몇년 뒤, 복수를 위해 후시카게로 돌아온다. 사카가미의 역습으로 위험에 빠진 주타로는 닌자인 카게마루에게 도움을 받아 도망친다.

<장미의 행렬> Parade of Roses

감독 마쓰모토 토시오/ 일본/ 1969년/ 105분

영화이론가로 활동했고, 일본 전위영화의 선구자인 마쓰모토 도시오 감독의 첫 번째 장편극영화. 게이바에서 일하는 에디는 주인인 곤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곤다는 바의 매니저인 레다와 동거하고 있다. 남성간의 삼각관계를 그린 영화 같지만, 이면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바탕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인 관계가 깔려 있다. 배우들의 인터뷰나 극중 내용과 전혀 의미없는 장면이 삽입되기도 하는 등 실험적인 영상으로 극영화와 실험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동반자살> Double Suicide

감독 시노다 마사히로/ 일본/ 1969년/ 104분

오시마 나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는 60년대 말 쇼치쿠를 뛰쳐나와 <동반자살>을 만들었다. 가장 일본적인 행태라고 할 정사(情死)에 이르는 남녀의 모습을, 추상적이면서도 전형적으로 그려낸 걸작. 우키요에와 커다란 문자가 그려져 있는 추상적인 세트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애정사, 질투와 사랑의 이야기는 인간의 정념이 아니라 지고의 가치를 찾아 떠나는 고행처럼 묘사된다. 공동묘지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노골적인, 그래서 더욱 처연한 정사장면이 인상적이다.

<에로스+학살> Eros Plus Massacre

감독 요시다 기주/ 일본│ 1970년/ 168분

60년대 쇼치쿠 누벨바그 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과격한 스타일을 보여준 요시다 기주의 걸작. 다이쇼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인물인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진 배우들이 벌이는 프리 섹스와 연극 등을 교차시키면서 자유와 정치의 관계를 상징한 실험적인 영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두 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소년이 호텔에 들어가 에이코가 섹스하는 장면을 본다. 질투도, 사랑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누리는 그들에게 세상의 억압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상> This Transient Life

감독 짓소지 아키오/ 일본/ 1970년/ 146분

일본적인 무상관(無常觀)과 에로스를 그린 작품. 비와호수 근처의 오래된 가문, 히노가의 장남 마사오는 가문을 이을 생각이 전혀 없다. 오로지 불상의 매력에 빠져 있는 마사오는 누이인 유리와 관계를 맺는다. 둘의 관계를 은폐하고, 계속 만나기 위하여 누이는 서생과 결혼하여 집에 머무른다. 속세를 떠나 해탈의 꿈을 꾸는 불상을 만들면서도, 주변의 여자들과 일탈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주인공의 ‘행위’가 역설적으로 무상을 연상하게 만든다.

<천사의 황홀> Ecstacy of the Angels

감독 와카마쓰 고지/ 일본/ 1972년/ 88분

핑크영화의 언어로 정치와 혁명을 말했던 와카마쓰 감독의 더욱 노골적인 정치영화.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와카마쓰 고지는 고립된 투쟁을 감행하는 개인만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천사의 황홀>은 그런 와카마쓰의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혁명군 ‘사계(四季)협회’의 가을군단은 미군 기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다. 그러나 10월이 부상을 당하자, 겨울군단은 가을군단의 무기를 빼앗아 직접 수도 총공격을 시도하려고 나선다. <천사의 황홀>이 공개될 당시, 마치 현실을 예언이라도 하듯 과격파의 신주쿠 트리 폭탄사건이 발생하여 논란이 일었고, 다른 극장의 상영이 취소되어 아트 시어터 신주쿠 문화(新宿文化)에서 단독으로 상영했다.

<전원에 죽다> Pastoral: To Die In the Country

감독 데라야마 슈지/ 일본/ 1974년/ 102분

시인이자 연극연출가이며 영화감독인 데라야마 슈지는 아방가르드한 일본 문화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전원에 죽다>는 데라야마 슈지의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한 영화감독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는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집착적인 애정을 보이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소년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무녀에게 죽은 아버지와 말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거나, 서커스단의 인기인인 공기 여자의 펌프를 눌러주거나, 짝사랑하던 옆집 신부와 도망가기도 한다. 상징과 환상, 기묘한 이야기와 인물들이 어우러져 실험극을 보는 듯한 영화다.

<료마 암살> Assasination of Ryoma

감독 구로키 가즈오/ 일본/ 1974년/ 118분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되기 전 3일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 거대한 혁명의 와중에서 누가 적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그린 <료마 암살>은 에도 말기시대가 배경이지만 동시에 70년대의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개혁파인 료마는 막부의 암살 대상인 동시에 근황의 주류파에도 저격 대상이 된다. 한편 료마는 막부쪽인 신센구미의 일원 토미타 사부로의 여자인 반과 가까워지게 된다.

<청춘의 살인자> Young Murderer

감독 하세가와 가즈히코/ 일본/ 1976년/ 116분

나카가미 겐지의 <사음>을 영화화한 <청춘의 살인자>는 엄격한 부모에게 억눌리던 심약한 소년이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차갑게 그려낸다. 하세가와 가즈히코의 충격적인 데뷔작 <청춘의 살인자>는 당시 <키네마준보> 베스트 1에 올랐고 감독상, 각본상 등을 휩쓸며 주목받았다. 22살의 준은 어릴 적 친구인 케이코와 함께 부모에게 물려받은 바를 경영한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케이코가 강간을 당한 충격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준은 그를 죽여버린다.

<역분사 가족> A Crazy Family

감독 이시이 소고/ 일본/ 1984년/ 106분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를 영화화한 기묘한 홈드라마. 필사적인 노력으로 교외에 전원주택을 마련한 아버지. 전형적인 주부인 아내와 도쿄대를 목표로 공부하는 아들, 아이돌광인 딸과 함께 드디어 행복한 ‘마이 홈’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형의 집에서 쫓겨난 할아버지가 함께 살게 되고, 흰개미를 발견하면서 행복한 가정은 균열이 시작된다. 일가족이 서로를 죽이기 위하여 대격전이 벌어지는 후반부는 폭소와 공포를 함께 느끼게 한다. 도발적인 펑크 정신으로 일본보다, 해외에서 더욱 평판이 높았던 작품.

김봉석 lotusi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