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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모르거나, 영화를 모르거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진보신학자가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폐악

‘드디어’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국내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성서의 예수 고난 이야기를 ‘그대로’ 영상화했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복받치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비기독교인들은 제대로 이유나 영문도 밝히지 않는 예수의 고난묘사에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성서의 사실 그대로’라고 감상을 표현한 바티칸 교황과 그 주변의 신부들은 성서의 예수를 제대로 모르거나 아니면 영화에 대한 문외한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래도 교황인데 예수를 모를 리 없다고 믿어 그분이 영화를 잘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려 해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그러나 정말로 이 영화가 예수의 고난을 사실 그대로 묘사했을까? 잠시만 생각해봐도 ‘역사의 사실’ 운운하는 것은 흥행성을 위한 허구에 불과함을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시공간을 분할하고 내용의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영화매체의 특성상 ‘사실 그대로’라고 운운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처세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고난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가위로 자르고 이곳저곳 편집, 첨가해놓았기 때문에 전문 신학자가 아니고서는 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고난 이야기의 왜곡을 찾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 왜곡은 예수 이미지의 왜곡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사실 묘사가 아닌 진실의 유폐

교묘한 이미지 왜곡을 위해 이 영화가 첨가한 대표적인 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붙잡아가는 병졸들이 예수를 끌고 가면서 그에게 가하는 무지막지한 폭력인데 이 장면은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미명으로도 수용될 수 없는 억지이다. 성서에도 없는 이 폭력장면은 앞으로 전개될 더 심한 폭력영상을 위해 관객을 예열(豫熱)시킬 뿐이다. 한편 멜 깁슨이 고의로 삭제한 부분의 대표적인 부분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가는 동안 지치긴 했어도 자신들을 위해 우는 사람들에게 한 마지막 말들이다. 그 말의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성서의 기록은 영화에서처럼 골고다의 언덕으로 가는 길목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무지막지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그 당시 분위기가 또한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살벌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첨삭이 보여주는 멜 깁슨의 성서내용 비틀기는 자신의 예수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시도된 비열한 가위질이다. 이 영화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성서조차 예수가 당한 고난의 ‘사실’을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성서는 예수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원인’이나 죽어가는 상태를 ‘묘사’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죽음의 이유, 즉 ‘죽음의 뜻’을 밝히기 위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성서를 토대로 ‘역사적 사실’을 방증하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이 모순은 영화 전체가 사실(fact)의 묘사 속에 진실(truth)을 유폐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멜 깁슨이 이 영화의 대사를 아람어와 ‘거리의 라틴어’를 고집한 이유 또한 의심스럽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배우들의 어색하기만 발음들이 가져다주는 역사의 현실감은 잠시이고 하나의 낯선 외국어 표현으로 머무르게 된다. 오히려 이러한 언어선택은 관객이 앞으로 전개될 사실 같지 않은 이야기조차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미리 강요하는 장치로 역할할 뿐이며, 고집스럽게 이 언어사용을 시도한 것 자체가 이야기 묘사가 지닌 사실성의 빈약함을 방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보완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읽혀질 뿐이다.

멜 깁슨 개인의 폐쇄적인 보수주의 신앙을 나름대로 이해한다고 치더라고 그의 신앙심이 지닌 예수 고난에 대한 무지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극대화하고 있는 예수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묘사는 고통과 고난을 동일시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고통은 단순히 뜻없이 당하는 육체의 아픔을 묘사하는 반면, 종교세계에서 다뤄지는 고난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그 고난이 지닌 ‘뜻의 지평’을 강조한다. 성서는 예수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이 지닌 새로운 존재와 삶으로의 변화를 위한 고귀한 자기 희생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세계에서 볼 때 고통을 한낱 고통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과 그 고통의 너머에 담긴 고난의 뜻을 담지한 사람과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다.

신앙과 사회의 보수주의를 독려하는 폭력영화

성서가 전하는 고난받는 예수의 이미지는 그의 몸에 가해지는 육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의연하고 굳건한 예수 이미지이며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자기희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 비친 예수의 이미지는 일그러진 얼굴과 파여진 살덩이로 쇠사슬에 묶인 채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며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뿐이다. 그런 모습에서 나오는 예수의 최후의 발언이 아무리 의미있다 해도 관객은 그 말에서 어떤 권위나 깨침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예수가 당한 고난의 뜻을 읽어낼 수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예수 고난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성서가 묘사하지도 않은 예수의 육체에 무차별하게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强度)와 수위를 높여가는 폭력영화의 법칙에 따라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영화도 다른 예술매체와 마찬가지로 그 영화가 만들어진 ‘삶의 자리’가 있어서 시대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동안 예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종교영화는 수없이 많았지만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 이런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앙과 사회의 보수주의를 독려하고 응집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기독교영화들은 미국인의 기독교 정신을 자극하면서 보수주의 사회, 정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거나 합리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9·11 테러와 이라크 침공 등을 통해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고 나선, 미국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신앙과 사회의 보수주의자의 단결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제작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전세계 기독교인이 지닌 신앙의 보수주의가 사회적으로 보수주의를 가속화시키는 보이지 않은 역할을 하게 한다. 이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의 우월성과 보수성으로 똘똘 뭉치고 있는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이미지의 회상을 통해 자신들이 잊고 있던 보수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폐악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통해 다시 한번 자신들의 삶의 근거라고 말하는 예수를 과거 2천년 전에 자신들을 위해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신앙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수의 수난을 회상시키지만 현재 힘있는 권력층들이 저지른 전쟁의 고통에서 고난받고 있는 수많은 비참한 ‘오늘의 예수 고난’에 대해 눈감게 한다. 역사적 예수의 수난은 끝났지만 지금 이 역사 속에서 그의 뜻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수난의 현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작은 예수’들의 고난을 외면하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지금 이 세계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사랑과 평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사람으로부터, 전쟁과 기아에서 고난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이 떠올려지지 않는다.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예수 고난의 핵심이 바로 자신은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믿음과 예수를 따르는 자들 또한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교훈을 잊게 한다. 만약 이 영화를 통해 진정 감동을 받았다면 영화 속의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오늘 이 세계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인 부시를 비롯해 미국인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오늘의 예수’를 알아보고 돌아서는 ‘회심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영화가 번져간 그 어디에서도 그런 변화의 소문이 날아들지 않고 있다.

가롯 유다와 오버랩되는 멜 깁슨

멜 깁슨 스스로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희생의 잔혹성과 함께 그 위대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동시에 진정한 서정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오래 지속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함께 믿음, 희망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말이 얼마나 낯선 수사적인 표현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영화 어디에서 예수의 ‘위대함’, ‘서정성’, ‘아름다움과 지속되는 사랑’, 그리고 ‘믿음과 희망’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이 영화를 보고 예수 수난의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논리로 각색된 멜 깁슨의 예수만이 스크린을 피로 물들일 뿐,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진실은 스크린 속에 유폐되어 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만든 이 신념에 찬 영화로 말미암아 세계 흥행에 성공한 멜 깁슨이 수 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 영화의 흥행을 통해 엄청난 부를 얻은 멜 깁슨이 은전 삼십냥에 예수를 팔아먹은 가롯 유다와 오버랩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이 영화를 제작하게 한 멜 깁슨의 기독교 우월주의와 보수주의에 근거한 신앙의 내용은 멜 깁슨 개인의 신앙이기 이전에 오늘날 전통과 조직에 갇혀 예수와 상관없는 종교로 변질되고 있는 현실 기독교의 신앙이 전형이다. 그러기에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오늘의 기독교가 왜곡하고 있는 예수 이해의 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진/ 종교신학 박사·크리스챤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