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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버리고 구두를 사!
2001-06-07

극단적인 내용으로 구매 충동하는 닷컴 구둣 가게 노드스톰

제작연도 2000년, 광고주 NORDSTORMshoes.com, 제작 Fallon McElligot, Minneapolis,

아트디렉터 Scott O’Leary, 카피라이터 Michael Burdick

한적한 교외 외딴집 앞에 승용차 한대가 스르르 미끄러져 온다. 폴 앵카의 <`You Are My Destiny`>의 음울한 곡조가 스산한 분위기를 더한다. 운전석에는 여자가 앉아 있고 뒷자리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가 인사불성으로 곯아떨어져 있다. 장면이 바뀌면서 남자를 답삭 안아서 집 앞에다 살그머니 내려놓는 여자. 아직도 정신없이 꿈길을 헤매는 남편. 여자는 다시 차로 돌아가서 무언가를 찾아 들고오더니 그것을 남편의 손에다 쥐어준다. 아마도 남편이 소파에 앉아 온종일 갖고 놀던 TV리모컨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대충 정황이 드러난다. 남편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채널서핑이나 하는 이른바 카우치포테이토족이었고, 참다못한 아내가 잠든 남편을 여기까지 데려와서 유기하는 중인 것이다. 그러나 가련한 생각이 들었는지 여자는 남자의 러닝셔츠 소매깃에 메모지 하나를 붙여놓는 선심을 베푼다. ‘제 남편을 잘 부탁합니다.’ 뺨에다 살짝 뽀뽀를 해주곤 불쌍한 남편을 뒤로 한 채 유유히 떠나는 아내. 화면이 또 한번 바뀌더니 카메라는 잘 정돈된 옷장을 보여준다. 남편의 옷가지와 구두들이 한편으로 치워진 채 반쪽이 텅 비어 있다. 그 빈 공간을 자막이 채운다. ‘구두 놓을 장소를 비워두세요. NORDSTORMshoes.com.’ 세일즈토크는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한번 더 정리된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큰 구두점이 있습니다. 노드스톰.”

약간은 기괴한 분위기, 시니컬한 메시지를 암시적으로 전하는 쉽지 않은 CF다. 같이 살던 남편을 내다버리는 행위와 구두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이 닷컴 구두가게는 사람의 자리를 치워서라도 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 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건지? 궁금증의 실마리는 이 TV-CM과 함께 집행된 인쇄광고 연작으로 다소 풀린다. 옷장 한편에 잘 정리된 여자의 옷가지들, 그리고 알록달록 예쁜 여자 구두. 빈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카피가 암시적이다. ‘결혼생활 행복하세요?’ 다른 광고 한편은 똑같은 이야기를 좀더 직설적 화법으로 전하고 있다. 소파 옆 탁자에 액자 하나가 고즈넉이 놓여 있다. 그 안에는 반쪽이 찢겨나간 결혼 기념사진이 꽂혀 있다. 그래서인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웃음이 허한 느낌을 전한다. 이 여자의 반쪽은 어디로 간 걸까? 남편의 존재를 여자의 생활에서 들어내버려야 했던 이유는 도무지 무엇이었을까?

일상에서 너무나 소중한 보물들을 축출하고 대신 들여놓으라고 종용하는 절박한 필수품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 답이 구두라는 유일한 힌트는 이 회사명을 알리는 도메인 주소다. 자기 가게에서 만든 구두를 팔기 위해 지금까지 누려온 달콤한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라는 도전적인 유혹인 것이다. 그만큼 닷컴기업의 소비자를 향한 마케팅 공세는 영악하고 간특하다. 하지만 어디 이런 강짜가 광고에서나 나오는 생소한 이야기인가? 꼭 구두뿐만이 아니다. 탐나는 물건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발정신이 소비사회에서는 미덕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필리핀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이멜다는 구두수집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두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본능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그는 ‘미스 필리핀’ 시절부터 영부인 시절까지 모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3천 켤레의 구두를 전시하면서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가 그토록 구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두박물관 개관 연설에서 그녀의 심경은 드러난다. “나는 구두를 신을 때마다 아직 남편이 대통령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녀에게 구두는 자신이 영원한 스타임을 증명하는 훈장쯤으로 여겨졌을 게다.

여자들은 구두를 무엇으로 신는가? 패션인가? 발이 편한 구두? 디자인이 세련된 구두? 이탈리아 가죽? 다 틀렸다. 이제 여자들은 구두를 제품만으로 대하지 않는다. 브랜드로 느끼고 평가하고 즐긴다. 그럼, 브랜드 가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컬러, 레이블, 디자인, 품질, 소비자의 평가, 가격, 명성….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미지를 파는 것도 전략이다. 이때 구두는 맥루한의 견해처럼 발이라는 신체기능의 연장으로만 파악될 성질은 아니다. 자동차가 단순한 운송수단을 넘어서서 신분과 지위, 부와 능력의 상징으로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비해 국내에서 방송되고 있는 현대해상의 광고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구두를 신었습니다’라는 카피로 맞서고 있다. 허영의 키를 낮추고 가장 겸허한 자세로 고객을 위해 뛰겠다는 다짐이다. 이렇게 발을 감싸는 가죽으로 보면 사용가치가 구두의 품질을 재는 잣대가 되지만 현시의 백화점에 전시되는 순간 구두는 그 무엇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교환가치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 광고의 이데올로기는 그래서 사악하다. 당신의 공간에, 그리고 마음속에 욕망의 신발장을 비워두라는 충동질을 하는 것이다. 이현우|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