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낡은 향취에 젖은 ‘조용한 미국인’, <콰이어트 아메리칸>

<콰이어트 아메리칸>, 자유 진영의 주도권을 둘러싼 오래된 싸움을 묘사하다

보들레르가 저 유명한 <파리의 우울>에서 “삶은 순진한 악마들로 넘쳐나는 것이니”라고 통찰한 바 있듯이, 그레이엄 그린의 1955년작 동명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필립 노이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이 “무고함”이라는 가치에 정치적, 혹은 (제목이 암시하듯) 민족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부각하고 있다(원작소설은 이미 1958년에 한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영화는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패퇴하기 2년 전 식민지 시대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영화의 주요 내용은 순종적인 여인 퐁(그녀는 파울러의 정부이다)을 차지하기 위해 매사에 냉소적인 영국인 기자 파울러(마이클 케인)와 못 말리는 미국인 인도주의자 파일(브랜든 프레이저)이 벌이는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 노이스가 멋대로 꾸며내고 프레이저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깊이없이 연기한 주인공 파일은 “의도하지 않은 인과의 법칙”을 인격화하고 있는데, 이 짧은 머리의 정글 보이는 야구 모자를 쓰고 애완견에 끌려다니는 어느 미국 대통령처럼 애매하기 그지없는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하며 영화의 줄거리를 힘겹게 끌고 나간다. 이 열렬한 미국인이 만찬을 마친 뒤 퐁과 춤을 추기 위해 어설프게 그녀를 리드하려는 모습에서처럼 바보들은 언제나 허겁지겁하게 마련이다. 퐁을 얻기 위한 두 사내의 경쟁은 베트남의 영혼, 혹은 자유 진영 안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에 다름 아닌데, 이 멍청한 이상주의자는 파울러의 연인을 빼앗으려는 것과 더불어 불한당 같은 월맹군 장군 티에를 공산 반군과 프랑스 식민주의자들 사이의 “제3의 힘”으로 간주하고 지지하기까지 한다.

9·11 사건의 여파로 배급사인 미라맥스로부터 버림받아 창고로 직행했다가 1년 뒤 토론토영화제에서 마이클 케인의 탁월한 연기가 각광받으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영화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역사적 사례에 기반한 텍스트를 영화화한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하겠다. 원작자 그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자신의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는데, 책 속의 몇몇 인물과 사건은 실제 인물과 사건에서 차용해왔고(예를 들면 티에 장군의 존재나 1952년에 그를 향해 행해진 차량폭파 사건 등) 미국인 주인공 역시 남부 베트남 정권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도록 공작을 펼쳤던 CIA의 기린아 에드워드 G. 랜스데일을 모델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원작자 그린의 퉁명스러운 공식대로라면 “순진무고함이란 갈피를 잃고 세상을 헤매며 해라고는 끼치지 않는 바보 문둥이와 같은 것”인데, 상당히 반미국적인 성향을 보여준 원작은 당시 미국 내에서 비난을 야기했었다. 때문인지 뒤이어 <코멘터리>(Commentary)를 통해 이루어진 세련된 좌파 자유주의자 필립 라브와 흥분한 초기 네오-콘 다니엘 트릴링 사이의 격론은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현재적인 느낌마저 준다.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더도 덜도 아닌 당대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50년대 페이퍼백 판의 커버는 “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것이 전세계가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라고 적고 있고, 당대의 할리우드 작가-감독이었던 조셉 L. 맨케비츠가 각색해 영화화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콰이어트 아메리칸>의 첫 번째 영화 버전은(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호치민에서 촬영되었다) 수다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이하게 심각한 내용이었다. 가히 수정주의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인데, 앞서 언급한 CIA 요원 랜스데일에게 대본에 대해 자문을 얻고 영화를 당시의 남부 베트남 정권에 헌사하기까지 했던 맨케비츠 감독은 원작자 그린의 입장을 뒤집어 자신이 “세상에 만연한 반미주의와 공상주의와의 밀월관계에 반대한다”라고 회견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 영화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오디 머피가 연기한 파일은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편의주의도 당시에 영화의 상업적, 비평적 성공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비평적 옹호자는 젊은 고다르였고, 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 <콰이어트 아메리칸>이 그린의 원작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추켜세우며 자신의 1958년 베스트 10 리스트에 해당 작품을 올려놓았었다(과연 10여년 뒤 베트남전을 통해 그린의 소설이 미국 베트남 종군기자들의 필독서가 된 시점에서도 고다르가 그토록 열렬히 맨케비츠의 작품을 옹호할 수 있었을까?) “이 훌륭한 각본으로 오슨 웰스나 로버트 알드리치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얼마나 대단한 영화가 나왔을까?”라고 고다르는 적고 있지만, 노이스 감독의 이번 <콰이어트 아메리칸> 역시 그다지 훌륭한 작품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한) 이번 리메이크는 이전 작품에 비해 좀더 많은 액션과 로맨스 등을 보여주고 있고(지금의 100분인 상영시간보다 훨씬 길었을 원래의 편집시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급작스러운 내용상의 전계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좀더 일관성 있어 보이지만 여전히 낡은 향취와 분위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케인의 성찰적인 연기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설정해주는데, 영화 속에서 액션의 종결부는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미국이 베트남에 전면 개입하게 되는 1965년의 헤드라인들을 몽타주한 장면인 셈이다. 짧게 말해서, 새로 만들어진 <콰이어트 아메리칸>은 그린의 원작소설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이 소설이 진실되게 보이게끔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