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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를 읽는 아저씨의 십계(十戒)
2001-06-07

신현준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신현준/ 아저씨 http://homey.wo.to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찜찜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의미를 찾으려 한다고 해도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라. 21세기의 멘털리티는 ‘세상에는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도 나는 심심하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I. 이 책(은희경 저, <마이너리그>)을 다룬 TV프로그램을 보지 말라. 만의 하나 재방송을 하더라도 절대로 보지 말라. <긴급구조 119>나 <리얼 스토리> 식의 ‘재연’장면을 보면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이 싹 가신다. 심지어는 개그맨이 나와서 등장인물 4명의 성격을 분석해주는 장면까지 있다. 그렇다고 방송국과 PD들을 원망하지는 말고, 우아하고 품격있는 교양 프로그램을 지상파 방송에 마련해주는 배려에 감읍하라.

Ⅱ. 출판사가 ‘김영사’나 ‘황금가지’같이 돈독 오른 데가 아니라 ‘창작과 비평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말라. “대학교 다닐 때 ‘사구체 논쟁’(생물학 논쟁 아님)을 공론화했던 그 잡지 맞아?”라고 묻지도 말라. 당신이 그동안 한국사회 전반의 변화, 특히 특히 문화산업의 숨가쁜 변화에 둔감했음을 고백하는 것밖에 안 된다.

Ⅲ. 책의 전반부를 읽다가 “영화 <친구>랑 비슷하네”, “복고 바람에 편승했네”라고 주접떨지 말라. 작가의 깊은 뜻이야 알 수 없는 것이니 ‘운대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우리네 구질구질한 삶을 본격문학에서 다뤄주는 게 어디냐’라고 자위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Ⅳ. ‘여자가 감히 남자의 세계를 다루다니’라는 식의 반응은 시대착오적이니 내던져버려라. 책에서도 묘사되고 있는 한국 중산층 가정에서 남녀간 세력관계를 고려하라(때로 담력을 길러주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찜찜하다면 당신은 한국문학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는 사람이다. 그러지 말고 사춘기로부터 중년에 이르는 남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무르익은 글솜씨에 탄복하라.

V. ‘웃기려고’ 쓴 대목에서는 마음놓고 키득거려라. 마라톤을 하면서 내뿜는 입김을 “식인종의 도시락처럼”(83쪽)이라고 비유한 부분이나 “(여자) 팬티 앞부분에…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고 씌어 있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187쪽)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오버한 것 아냐’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세파에 시달려 유머감각이 마비된 자신을 원망하면서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는 ‘개그펀치’나 ‘에로비언 나이트’ 읽듯이 읽어라. 유치함을 드러내는 게 작중인물인지 작가인지 판단하기 힘드니 페이스에 말려들 필요 없다.

Ⅵ. 한국정치사의 격변의 와중에서도 주야장천 ‘놀고 있는’ 주인공들의 행태에 분개하지 말라. 이제 그런다고 ‘쿨’하게 봐주는 사람(특히 여자) 없다. ‘경직된’, ‘무거운’, ‘촌스러운’ 사람으로 찍히지 않으면 다행일 뿐이다. 하긴 ‘치열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 없는 요즘 세상이다.

Ⅶ.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찜찜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책에서 의미를 찾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 한다고 해도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라. 21세기의 멘털리티는 ‘세상에는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도 나는 심심하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어떤 아저씨가 얘기했던 ‘새털처럼 가볍게, 강물처럼 유유히’라는 삶의 신조를 견지하라.

Ⅷ. 작가가 ‘마이너리그’라고 묘사한 삶이 “기껏해야 ‘주류 코리안들의 표준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고 핏대 세우지 말라. 사상서나 이론서에서 마이너, 마이너리티에 관한 정의를 따옴표 치고 인용하면서 “마이너란 이류가 아니라…”라고 했다가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마이너의 자의식을 가지고 마이너를 정의하려는 순간 당신은 이미 마이너가 아니다. 자신이 마이너, 아웃사이더, 인디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Ⅸ. 책을 읽는 데는 넉넉잡고 두 시간이면 떡을 치지만, 대여점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말라. 십중팔구 ‘대여중’일 것이다. 이 책 빌려간 사람은 여기서 묘사된 남자들의 속물적 모습을 보고 통쾌해 할 아줌마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이들 대부분은 연체에 도가 통한 사람들이다.

X. 이상의 이야기를 작품에 대한 야유나 비아냥으로 듣지 말라. 이 책은 ‘이런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주장한다. 그냥, 적당히, 대충 즐기면서 살아라. 일년 전쯤 이 지면에 어떤 아저씨가 썼던 ‘6월의 자식들’ 따위의 글은 잊어버려라. 그 아저씨도 이 책의 150쪽 근처를 읽으면서 ‘내가 쓴 글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