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슈퍼맨, 혹은 소련으로 간 카우보이
2001-06-07

실존인물로 소재로 한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진실과 거짓말>

사실이냐 허구냐, 그것이 문제인가?

1) 우선 다들 아는 사실. 도대체 역사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한 히틀러의 부대가 순전히 스탈린 이름이 붙은 도시를 그냥 놔둘 수 없다는 똥고집으로 스탈린그라드로 쳐들어갔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소모전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2) 우리의 주인공 바실리 자이체프 역시 실제로 존재했다. 옆에 올린 사진을 보라. 영화 속의 주드 로처럼 미모는 아니지만 뭐, 영화란 그런 게 아니던가. 그는 시베리아 출신의 사냥꾼이었고 전쟁 동안 날렸던 저격수였다. 당시 자이체프는 400명이나 되는 독일군을 쏴죽인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중 150명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였다. 당시 그가 한동안 영웅 대접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긴 사태가 워낙 심란했으니 선전용 영웅이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한동안 자이체프는 선전 영웅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전세가 유리해져 진짜 괜찮은 뉴스가 쏟아지고 지뢰 폭발 때문에 일시적으로 눈이 먼 동안 그는 붉은 군대 최고의 저격수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3) 믿거나 말거나, 이 영화에서 로맨스 분위기를 풍기는 타냐 체르노바 역시 실존인물이다(영화 속에서처럼 유대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그 동네도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심했으니 편하게 살지는 못했을 거다). 타냐 체르노바는 자이체프의 능력있는 저격수 부하 중 한명이었고 둘은 정말로 애인 사이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영화 속에서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얄미운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행정장교 다닐로프 같은 사람은 실존하지 않았지만, 둘은 맺어지지도 않았다. ‘연인들을 갈라놓은 죽음’ 운운의 로맨틱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것이지. 영화에 나오는 이중스파이 샤샤 역시 실존인물이다. 하지만 사샤는 당시 꽤 나이를 먹은 틴에이저였고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자이체프와 특별히 관련있는 사람도 아니었다고 한다.

4) 자,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이체프의 이야기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가장 흥미로운 일화이다. 대충 내용은 이렇게 된다. 자이체프가 저격수로 명성을 떨치며 독일군들을 죽여대자, 독일에서는 떨어진 사기를 되살리기 위해 베를린 근방의 저격수 학교에서 근무하던 유능한 SS 장교 한명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냈다. 그의 이름은 하인즈 토르발트 또는 쾨닝 또는 쾨닉이다. 며칠간 손에 땀을 쥔 추적전이 계속되다가 자이체프는 결국 토르발트/쾨닝/쾨닉을 쏴죽인다. 꽤 극적인 이야기라 자이체프와 토르발트/쾨닝/쾨닉의 결투 이야기는 여러 편의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인들에게 자이체프의 이야기를 알린 사람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논픽션인 <애너미 앳 더 게이트>를 쓴 윌리엄 크레이그였다. 최근엔 라는 소설이 데이비드 L. 로빈스라는 작가에 의해 나오기도 했다.

5) 4번 이야기는 사실일까? 한동안 소련에서는 당연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렇게 믿을 만한 사실은 아닌 모양이다. 우선 독일쪽에서 자이체프를 죽이기 위해 저격수를 파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물론 증거가 없다는 건 하인즈 토르발트 또는 쾨닝 또는 쾨닉이라는 남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전쟁중 선전 목적을 위해 꽤 과장되어졌을 가능성은 크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소련쪽에서 어쩌다보니 사태를 과장해서 봤을 가능성도 높다.

포스트 냉전시대, 영웅이 필요해!

아무리 독일에서 자금을 대고 프랑스감독이 만든 다국적 영화라고는 해도 파라마운트사의 딱지가 달려 있고 주드 로, 밥 호스킨즈, 에드 해리스가 출연하는 러시아인 전쟁 영웅의 이야기를 보는 기분은 꽤 새롭다.

그만큼 세상이 바뀐 것일까? 물론 냉전은 끝났다.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스탈린그라드도 오래 전에 볼고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더이상 그들을 적성국으로 여기면서 날카롭게 굴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이런 영화가 나올 만한 분위기도 그럴싸하게 형성되었다. 요새는 노스탤지어가 풀풀 풍기는 제2차세계대전 전쟁영화가 유행인데,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소련은 ‘착한 쪽’이 된다.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 만날 미군 주인공들만 나오는 영화들과는 달리 신선한 느낌도 주니 흥행이나 비평면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영화는 소련을 그대로 착한 쪽으로 몰아붙이는 게 맘에 걸렸는지 당시를 기억하는 러시아사람들을 자극했던 불편한 장면들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진 다닐로프가 실망스럽다는 듯 읊조리는 장황한 대사 같은 것들을 첨가했는데, 사실 그렇게 영리한 선택은 아니었다. 우선 내용의 진위야 어쨌든 너무 거칠고 순진해서 때늦은 메시지영화 같다는 느낌이 들고, 둘째로 이런 건 전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두 거대한 파시스트 세력의 충돌’ 같은 게 아니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실제 액션에 아름답고 거창한 배경을 부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물론 ‘유일하게 가치있는 전쟁영화는 반전영화다’ 어쩌구하는 말을 듣고 자란 여러분들에게는 배경용 전쟁이 좀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거대한 폐허와 시체들의 스펙터클에 매료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투성이 스펙터클에 매료된다고 해서 관객이 그 참혹함을 잊는 것도 아니며 그들의 양식에 대단한 흠이 가는 것도 아니다. 스펙터클은 보기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며 관객도 바보가 아니다. 다들 그 정도쯤은 관리할 줄 안다).

그들이 보고 몰입하는 것은 무지 잘생긴 푸른 눈의 남자주인공이 영웅이 되고 스타가 되다가 결국 그와 맞먹는 상대를 만나 한판 붙는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슈퍼맨> 줄거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으며 기본적으로는 군복 입은 카우보이들의 서부극이다. 얼마나 영화가 주인공 영웅 위주로 흘러가는지 보려면 도입부의 관객 반응을 확인하면 된다. 바실리 자이체프가 총탄만 분배받고 총도 없이 독일군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때 관객의 생각은 거의 같다. ‘제발 아무나 빨리 죽어라. 그래야 우리의 주인공이 총을 챙기고 영웅이 될 테니까.’ 쑥스러워할 것도 없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여러분이 실생활에서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할리우드라는 이름의 보편성

관객은 설득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충분히 그럴싸하게 묘사되고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스타 퀄리티가 충분하면 그들은 주인공이 나치라도 훌렁 넘어갈 것이다. 영화 속의 주드 로를 보면서 과연 그가 소련 군인이라는 것을 신경쓸 사람이 있기는 할까? 하긴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가 이상하게 뒤섞여 있고 기초적인 러시아 이름 발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영화에서 그런 걸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 수는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웅의 탄생 과정이다. 생각해보라. 바실리 자이체프의 이야기를 검증된 그대로 옮겼다면 영화는 분명 훨씬 사실적이고 덜 할리우드적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다닐로프의 마지막 대사나 장군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흐루시초프의 모습 같은 것을 넣지 않아도 충분히 이미 죽어버린 체제에 대한 훨씬 그럴싸한 비판으로 기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실제 자이체프의 모습을 쓰지 않았다. 장 자크 아노가 가져온 것은 소련이 만들어낸 정치선전물의 주인공 바실리 자이체프였다. 물론 영화 속에서 자이체프는 자신이 소련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민도 좀 하지만, 그 정도의 고민은 요새 할리우드 액션영화 주인공들도 한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언제까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부자처럼 단순한 영웅으로만 남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바실리 자이체프는 분명 대단한 저격수였겠지만 그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전시의 소련이 전쟁 선전용으로 만들어낸 창조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창조물은 할리우드영화의 <와이어트 어프>나 <인디아나 존스>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소련 공산당 선전물이 그처럼 쉽게 할리우드영화로 편입된 것도 이상할 것 없다. 목적이 살짝 다를 뿐이지 둘은 같은 부류이며 같은 부류의 대중들을 위해 봉사한다. 근사한 주인공과 멋진 액션이 결합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사람들은 스포츠팬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이 영화 속의 자이체프가 어딘지 모르게 기록 경신을 앞둔 스포츠스타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인지? 적어도 내 눈에 자이체프는 러시아 저격수 버전 마이클 조던이다.

아, 이 영화가 할리우드영화라기보다는 유럽의 다국적 영화라고? 역시 다를 건 또 뭔가? 우리가 할리우드영화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생각 외로 보편적이다. 사람들은 어딜 가도 비슷비슷하고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들을 할리우드 영웅주의라고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할리우드 고유의 발명품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독점한 뒤 다른 동네에서 경쟁하기 힘들 정도로 비싼 물건을 만들어 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 자크 아노가 굉장히 할리우드풍의 전쟁영화를 만들었다면, 그건 그가 할리우드에 영혼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서 일부러 할리우드영화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야 어떻건 그 과정은 오히려 자신에게 더 솔직했다.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