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패트리어트>의 상황과 달리 <투모로우>는 물리칠 악의 무리가 없다는 점이 이야기 구조에 부담을 안긴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 끌어온 것은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를 통해 위력이 입증된 기독교적 테마와 공포물의 장르적 차용이다. 그것은 스타일과 내용의 분리를 의미한다. 구텐베르그 초판 성경을 감싸안고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와 페니실린을 구하기 위해 나선 아이들 앞에 뜬금없이 나타난 늑대들이 바로 그 산물이다. 환경의 중요성이나 문명의 자승자박을 강조하기보다는 인류와 ‘자연’이라는 신격을 충돌시키는 근대적 ‘원죄’의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투모로우>에서 신과 기후와 플롯은 동격이다. 아들을 위해 장도에 오른 아비의 애틋함은 어이없는 동료의 죽음과 지나친 우연이라는 악천후에 비틀거린다. 반대편에서 아버지의 도착을 기다리는 아들(제이크 길렌할)의 확신도 인과적인 연결고리 없는 막연한 기대에 가깝게 그려진다. 앨 고어를 닮은 고뇌에 찬 대통령은 대사 한줄로 화면에서 사라진다. 국민들의 대피를 과감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우유부단함과 아비의 확고부동한 결단은 결과로만 따지면 극적으로 대비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 본질적 차이란 없다. 그것은 단지 운명론이라는 좁은 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전적으로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미세한 간격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