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변증법적 유물론자입니다.” 최근 만난 어떤 분과 대화를 하다가 듣게 된 말이다. 아, 변증법이라니, 유물론이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인가. 이미 십수년 전에 완전히 멸종됐다고 학계에 보고된 희귀동물을 도시 한복판 술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부서지는 역사를 목도하며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갔다”라는 말을 하고,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깨동무를 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었다. 깃발은 내려지고, 동상은 철거되고, 군중은 해산했다. 그즈음 13대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씨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이념과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먹고살기에 급급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이끌었다. 그렇게 저마다 먹고사는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단어를 동원하는 대화를 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후로 과연 우리는 대체로 전셋값이나 안정되고 불경기나 해소되었으면 큰 동요없이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보통사람이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과 자연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관계의 모순을 해결하고 갈등을 통해 발전을 모색하는 의식의 실천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갔다’라는 또 하나의 엉터리 이데올로기에 속아서 토론을 중단하고, 갖가지 계략과 음모와 조장된 여론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대응하지 못한 채 이 세계에 여전히 헌신하고 있다. 매일 출근을 하고, 매출을 늘리고, 학교에 보내고, 세금과 집세를 내고, 국민연금을 바치고, 투표를 하고, 응원을 하고 파병을 하고, 헌금을 한다. 때로 약간의 반감은 있지만 혁명을 이야기할 정도로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그저 내가 좀 양해를 하면 그만인 작은 문제들이다. 안정이란 다름아닌, 보통사람인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다. 철학과 이념을 논하지 말고, 종교와 예술을 의심하지 말고, 세계와 나의 관계를 고민하지 말고, 정치와 정의를 비교하지 말고 묵묵히 밥벌이나 하면 되는 시대라는 것이 탈이데올로기, 보통사람의 시대인 것이다. 설령 이 시대에 큰 문제가 있다손, 주동자의 동상이 없고, 주모자의 깃발조차 없으니 모순과 부조리를 발견해도 대항하고 투쟁할 수가 없다. 어쩌면 탈이데올로기란, 가장 크고 강력하며 보이지도 않는 파쇼인지도 모른다.
인류역사 속에서, 한때는 현자와 선지자가 세상을 이끌던 시대가 있었다. 또 철학자가 세상을 이끌던 시대가 있었으며, 한때는 영웅호걸이, 왕족이, 귀족이, 성직자들이, 또 한때는 선동자와 혁명가가 세상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역사의 변화는 이념의 생성, 유지, 보수, 교체의 과정이었다. 지금은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 이념과 정의와 철학과 예술 따위는 석유 한 방울의 가치만도 못하다고 여기는 장사꾼의 세상이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