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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칸 영화제, 어떤 영화들이 있나?

칸의 영화들

심사위원장인 타란티노가 개막 기자회견에서 열정적으로 옹호한 바대로 만약 칸영화제가 정말로 영화인들의 천국이라면, 어디선가 천사들의 노래 소리라도 들려오길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평론가들이 늘 최고의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혹은 상상하며) 방문하는, 못 말리게 장중하고 구제불능으로 들떠 있는 칸영화제의 속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막작 <나쁜 교육>은 페도르 알모도바르 감독이 지난 20여년간 만들어온 영화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솜씨좋게 이야기를 얽어놓은 이 누아르풍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그는 과거 <마타도르>나 <욕망의 법칙>에서 보여준 섹스의 불꽃놀이와도 같은 세계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발칸반도의 국가주의적 광기를 상기시키는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그는 이미 두 차례나 칸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은 바 있다) <삶은 기적이다> 역시 <언더그라운드> 이후 그가 지난 10년간 만들어온 작품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여겨진다. 난투극으로 번져버리는 축구경기 장면은 황홀할 정도로 훌륭하게 안무되었는데, 여기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손에 술병을 들고 춤을 춘다. 국가주의의 우둔함에 대한 쿠스투리차식의 환기(喚起)는 영화가 멋없는 러브스토리와 함께 유혈낭자한 유죄선고를 시도하기 전까지 섬뜩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영화제가 반쯤 진행된 시점에서 가장 열렬한 반응을 얻은 작품은 세네갈 감독인 우즈만 셈벤의 <무라드>(Moolaade, 보호)가 아닌가 한다. 1960년대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영화의 기틀을 다진 우즈만 셈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아프리카에서의 여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한편의 유쾌하면서도 오락적인 선동극(?)을 완성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군집성이라는 서부 아프리카 마을의 특성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낸 뒤 이를 과장된 연설조의 대사와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뮤지컬 곡들, 사회적으로 재구성된 캐릭터들을 통해 조합해내는 “태생적” 브레히트주의자의 방법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낡은 마르크스주의자적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명확하게 민속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영화는 결코 고지식하지 않다. 지나치게 고무적인 엔딩이 중국의 혁명가극을 연상시키지만, <무라드>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각색해보는 것도 한번쯤 상상해볼 만하다.

프랑스어권의 아프리카영화를 대변하는 거장이 자기 영화 인생의 황혼기에 관객이 만끽할 만한 작품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무라드>는 경쟁부문에 초청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 작품이 이등석에 해당하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현재 칸영화제의 방어적인 자세를 드러내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지난해 칸영화제는 엘리트주의적이며 미국에 대해서 배타적이라고 (<버라이어티>에 의해서 가장 맹렬하게!) 비난받은 바 있는데, 티에리 프리모에 의해서 전체가 프로그램된 최초의 해인 이번 칸의 선택은 가히 감동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포용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이노센스>나 한국의 액션 감독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함께 <레이디 킬러>와 <슈렉2>가 나란히 경쟁부문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혁신적이라고 할 두 작품인 와 <우리들의 음악>은 안전하게도 비경쟁 부문에 배치되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감탄스러울 정도로 간결한 작품 는 (영화의 제목처럼 영화는 단 다섯개의 컷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의 미니멀리스트 감독 어니 걸의 뛰어난 모방자에 의해서나 만들어졌을 법한 DV판 풍경 탐구라고 할 만하다. 고다르의 능수능란하면서도 우아한 작품인 <우리들의 음악>은 도발적으로 편집된 몽타주 장면으로 시작해 연옥(煉獄)과도 같은 사라예보의 작가회의 장면을 거쳐 미 해병에 의해 점령된 유대인 자폭 대원들의 천국에서 끝을 맺는다.

기괴하게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우리들의 음악>은 20세기 유럽과 영화, 그리고 스스로에게 바치는 감독의 (이전에도 익히 시도한 바 있던) 애가(哀歌)라고 하겠다. 키아로스타미의 와 마찬가지로 고다르의 본 작품은 <트로이>나 <새벽의 저주>, <배드 산타>, 장이모의 무협 대작 <연인>, <킬 빌> 등과 같이 비경쟁 프로그램을 잔뜩 메우고 있는 대작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장의 취향이 취향인 만큼, <킬 빌>의 상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르영화와 아시아 대중문화의 코드들로 영화제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심사위원장 타란티노 자신은 스타 위주의 영화의 중요성에 대한 호전적인 논지로 몇 차례 언쟁을 벌인 바 있는데, 이 호전적인 감독은 기자 회견을 통해 1992년의 칸 방문을 회상하면서 당시 의 두 번째 상영이 있었던 곳 주위에서 싸움을 촉발했던 이가 자신이라는 점 또한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그는 “그때 그 싸움은 정말 유명해졌지요, 그게 바로 저랍니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명사들간의 알려지지 않은 서바이벌 게임에 있어서 첫 번째 라운드를 차지한 것은 역시 마이클 무어였는데, 그는 간신히 프랑스의 한 노조 집회에 참가해 자신이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와 연대하고 있음을 과시할 수 있었다.

미약한 대로 이제까지의 경쟁부문 상영작들 중에서 가장 호평을 받은 작품은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캐릭터코미디 <룩 앳 미>(Look at Me)가 아닌가 한다. 가장 평이 엇갈린 작품은 역시 여성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라 니냐 산타>인데, 이 작품은 좀더 덜 친절하면서도 더 수수께끼 같은 (딱 코미디라고 할 수만은 없는) 코미디 작품이다. 하지만 역시 “무조건 보아야 할” 작품으로는 급히 추가된 추가상영을 보고 나오는 비평가들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TV 카메라맨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작품 <화씨 911>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씨 911>은 이라크 침공에 대한 부시 정부의 논리를 제대로 반박하고 있는데, 부시 집안과 오사마 빈 라덴 일가를 연결지음으로써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한편 일련의 몽타주를 통해 항간의 공공연한 거짓들을 통렬하게 공박하고 있다. 영화는 또한 현재의 미 정부 관료들이 나치 선동 이론가 괴벨스에 의해 창안된 “더 큰 거짓말이 더 잘 통한다” 작전과 군사 쇼로 현혹하기, 애국적 브로마이드 배포 등의 방법론을 끈덕지게, 혹은 미련하게 추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소 길게 느껴지고 최근의 상원청문회나 포로학대 케이스 등을 담기 위해서 추가된 장황한 주장들로 인해 때때로 단절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 <화씨 911>은 분명 마이클 무어의 이제까지의 영화 경력에서 가장 진솔하면서도 목적의식이 분명한 작품이다.

자기 홍보의 대가인 만큼 마이클 무어는 디즈니의 배급 거부 사태를 오히려 제대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이 디즈니의 선택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희석시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화씨 911>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사실을 폭로하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줄거리를 제시하고 있는 만큼 어쩌면 재선을 노리는 부시의 선거 전략에도 일정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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