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과 4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었다. 천동설이라는 의심할 여지없이 단호한 우주관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싹이 트고, 나아가 중세의 절대적인 종교관, 세계관을 이루었었다. 하지만, 가운데서 꼼짝하지 않던 지구가 어느 날 태양에 중심 자리를 내주고 세 번째 행성으로 태양 주위를 뱅뱅 돌기 시작하면서 인류가 기댔던 수많은 절대 믿음이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인간은 점점 더 정교한 관측기계를 발명하고, 더더욱 논리적인 계산과 추론을 통해 과거의 상식이 오해였음을 증명하고 과거의 믿음이 무지의 소치였음을 깨우친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에 한발씩 다가가는 것인가? 시간의 탄생과 우주의 크기를 계산하고 게놈 유전자 지도를 판독하여 생로병사의 원리를 그래프로 정리하듯이 진실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질 뿐이다. 지금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일년에 한 바퀴씩 돌고 있지만, 분명히 그렇지만, 사실 또 알고보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시공간구조로 우주 삼라만상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또 알고보면 그 어느 것도 돌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또 알고 보면 우주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알고보면 우리는 태어나고 살다 죽는 것도 아닐 수 있고, 또는 태어나서 살다 죽어 흙이 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누가 진실을 볼 수 있는가. 누가 태양을 직시할 수 있는 가. 태양은 언제나 빛나고 있지만 우리가 관측하는 것은 변덕스러운 구름일 뿐이다. 구름의 형태를 관측하며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태양은 직시하지 못하고 구름은 덧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더이상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해를 확인할수록 신념이 희박해져간다. 자연현상을 이해할수록 신앙은 흔들린다. 우리는 존재도, 인식도, 현상도, 그 무엇도 실재라고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식의 신념이 없으면 감정의 욕구에 집착하게 된다.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질서와 인생의 순리와 인간의 진실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욕망과 감정적 쾌감에 대한 확신만이 분명해진다. 그런 까닭에 확고하게 천동설을 믿었던 그 옛날보다 한결 많은 진실을 알고 있는 오늘,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의심을 가진 까닭에 더 무시무시한 물욕과 탐욕과 쾌락에의 집착이 만연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과학이라는 것은 사실, 진리에 다가간다는 미명하에 신념을 부수고, 신앙을 무력화하여 인간을 물질계에 국한된 존재로 머물게 하려는 악마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신뢰이다.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신념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절대 진리는 없다. 단지 신념이 있을 뿐이다. 법정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투덜거린 갈릴레오처럼, 지금은 “이래야 지구가 돈다”라는 저마다의 신념이 절실하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