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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화면 속에 동화된 음악, <붉은 돼지> OST

‘피곤하여 머릿속이 두부처럼 되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표방한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2년작이다. 이미 VCD라든가 DVD로 접한 팬들이 많겠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하야오의 작품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애니메이션은 1차대전 뒤 삶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돼지가 되어버린 조종사 프로코 로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제 역시 그의 다른 것들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식 문명비판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

음악은 역시 히사이시 조가 맡았다. 히사이시 조는 잘 알려진 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둘도 없는 단짝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천공의 성 라퓨타>를 거쳐 <이웃집 토토로>에 이르면 이 둘의 팀워크는 한몸처럼 긴밀해진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히사이시 조가 들려준 자유자재의 편곡 테크닉은 영화를 자연스럽게 살려주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붉은 돼지>에서도 히사이시 조의 그러한 테크닉은 빛을 발한다. 히사이시 조는 드라마의 구성이나 화면의 전개 바깥으로 절대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영화음악은 그런 것이라는 점을 히사이시 조만큼 잘 보여주는 음악가도 없다. 그는 나서지 않고 차분하게 화면을 보조하는 데 주력한다. 음악을 일부러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 음악들은 마치 바람소리처럼 화면의 일부분이 되어 사람들에게 눈치채지 않은 채 흐른다.

O.S.T 음반에는 모두 23개의 트랙이 들어 있다. 전형적인 히사이시 조의 통속적 테마인 <시대의 바람-사람이 아름다웠던 때>는 영화의 분위기와 맥락을 되짚는 오프닝 넘버이다. 특유의 자연스러움과 심플함이 귀에 감기는 멜로디 속에 녹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번 그의 멜로디가 똑같은 기분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토토로>가 전원적인 분위기와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함께 전달해주는 데 주력했다면 <붉은 돼지>의 취향은 그것보다 약간 성인취향이다. 좀더 감각적이고 센슈얼한 구석도 느껴진다. 이런 대목은 히사이시 조의 새로운 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O.S.T에서 히사이시 조 말고 주목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일본 뮤지션이 있는데, 다름 아닌 가토 도키코이다. 이 가수는 일본을 대표하는 스탠더드 가수의 한 사람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그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O.S.T에는 장 밥티스트 클레망의 샹송을 원곡으로 하고 있는 <체리가 익어갈 무렵>과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나오는 <때로는 옛이야기를>, 이렇게 두곡이 실려 있다. 모두 잔잔하고도 통속적이면서 약간의 격조마저 느껴지는, 전형적인 일본풍 ‘어덜트’ 취향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