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사랑에 관한 사색과 성찰이 담긴 로맨틱코미디, <아는 여자>

야구선수 정재영이 야구장에서 벌이는 기이한 반칙들이 묘한 통쾌감을 주듯 삐딱한 로맨스로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용감한 로맨틱코미디

잘 뚫린 고속도로는 지루하다, 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일직선으로 뻥 뚫린 그 길이 설사 시속 160km를 보장하더라도 시야에 변함없는, 기껏해야 매번 똑같이 생겨먹은 휴게소만을 제공하는 고속도로는 질색이라고. 아마도 장진 감독이 이 축에 들지 않을까. 속도를 속시원히 낼 수는 없어도 굽이굽이 돌아가는 국도를 선호하는 부류 말이다. 이런 길은 지루하지 않다, 고 믿을 것이다. 요모조모 눈요기하며 내지르다가 떡하니 눈에 쏙 들어오는 곳이 나타나면 아예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나마 한눈팔기에 좋으니까. <아는 여자>는 앞만 보고 내달리는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다. 목적지는 같고, 여하튼 그곳에 도착하기는 하지만 자꾸 딴짓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타이밍에 그럴 것 같지 않은 캐릭터가 일을 벌인다. “사랑은 새벽길을 산책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아침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운치있게 내레이션을 쏟아내던 이가 예상치 못하게 이별을 선언하는 여자 앞에서 쿨하게 반응하지 않고 가래침을 탁 내뱉으며 “가라, 너!” 하고 발길질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끝내 재회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각자 죽음을 맞이하는 연인의 비극적 멜로물에서 진짜 주인공은 전봇대라고 우기는 영화를 상상해보라. ‘내겐 아주 특별한 그녀’도, ‘프리티 우먼’도 아닌 그냥 ‘아는 여자’라는 제목처럼 장진 감독은 장르를 거스르는 장르에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그 장르가 하필 멜로이니 이건 관객의 감정선을 쥐락펴락할 자신감이 없고서는 불가능할 일이다. 시한부 인생의 씁쓸한 사랑찾기를 콧구멍 후비기의 부작용과 연결짓는 용기가 없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는 여자>의 이런 욕망은 TV적 캐릭터라는 완충장치 혹은 안전망 안에서 빛을 발한다. 한이연(이나영)이 그 남자에게서, 그와의 관계에서 원하는 게 도대체 뭘까? 이연은 간혹 짜게 만들기는 해도 아주 맛깔스런 음식 솜씨를 갖고 있다. 신혼의 아늑한 식탁처럼 가지런히 음식을 마련해놓고 꾸벅꾸벅 졸며 남자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아침을 맞아도 그녀는 화가 나지 않는다. 드는 생각이라곤 오로지 그의 안위뿐이다. 이 러브스토리는 10년 동안 가슴졸이며 살아온 ‘성실한 스토커’, 한이연의 사랑맺기다. 그녀의 외사랑은 프로야구 2군 외야수 동치성(정재영). 그가 여자에게서, 여자와의 관계에서 원하는 건 도대체 뭘까? 적어도 섹스는 아니다. ‘자살 마라톤’(폐암 말기라면 누구나 마라톤은 죽음으로의 질주라고 생각할 수 있다)을 시도해도 자살은커녕 상으로 김치냉장고를 받아올 정도로 혈기방장한 운동선수이건만 뜨거운 섹스를 꿈꾸는 게 아니라 ‘사랑이 뭐냐’라는 고난도 질문만 연신 해댄다. 하긴 그는 남들에게는 다 있으나 자신에게 없는 세 가지를 자각한 게 아주 최근이다. 악성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이라고 판결받은 그에겐 내년이 없고, 아직 첫사랑이라고 기억할 만한 게 없으며, 아무리 술에 취해도 주사가 없다. 그렇지만 남들에겐 없고 그에게만 있는 게 있으니 10년 동안 자기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녀의 존재다. 그녀를 쳐다봐주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엉뚱한 사건이 끼어들면서 그 결실이 지연된다. 그 사이 겹겹이 쌓아놓은 에피소드들이 관객의 흥분지수를 정교하게, 지속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진짜 주인공이 동치성인 것처럼 이 영화의 야심은 한이연의 10년 사랑이 지닌 비밀을 밝히기보다는 ‘사랑이 뭐냐’라는 동치성의 질문에 답하는 데 있다. 사랑에 관한 사색과 성찰이 담긴 로맨틱코미디라니, 이건 영국의 워킹 타이틀도 쉽게 엄두낼 일이 아니다. <킬러들의 수다>에선 웬만해서 읽어내긴 힘들던 장진 감독의 두 번째 속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그는 혹시 “사랑이 그래, 사랑은 원래 허약한 거야, 사랑을 잡아 이 등신아”라고 악쓰며 목숨걸지 않아도, 내 주위에 맴도는 그저 아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도 있음을, 지나고보니 그게 사랑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안타깝게 절감한 게 아닐까. 영화는 그 사람의 이름과 나이와 혈액형을 너무 늦기 전에 물어보라고 권한다. 사랑이 정말 그런 거다, 라고 응답하느냐 마느냐는 결국 각자의 사정에 달린 일이지만, 한국형 로맨틱코미디의 용감한 일보 전진을 알리는 <아는 여자>의 아쉬움은 ‘섹스리스 로맨스’라는 데 있다. 이 거세 현상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인어공주> <아는 여자>에 이르는 한국형 로맨스에는 있고, ‘워킹 타이틀’표에는 없는 것이다. 이제 성인식을 치를 때도 되지 않았을까.

:: 감독 장진 인터뷰

기존 멜로와는 조금 다른 걸 만들려고 했다

장진 감독이 <킬러들의 수다> 이후 3년 만에 러브스토리를 들고 돌아왔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원빈의 진지한 사랑예찬 장광설을 낄낄거리며 즐기게 했던 솜씨의 확장판이다. 장진 스타일은 멜로에서도 힘찬 생명력을 보인다.

전작들에선 잘 드러나지 않던 감독의 속내가 눈앞에서 드러나는 영화는 이게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런가? 대중의 악취미를 건드려주는 영화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밝고 건강하게 대하고 싶은 상업영화를 만들려고 했고, 전작들보다 훨씬 쉽게 풀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내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이런 내 작품을 통해서 나도 건강해지고 싶어서.

멜로를 만들기로 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예전부터 해온 구상들 즉, ‘세 가지 없는 남자 이야기’, 영화 속 영화로 등장하는 ‘혈통 깊은 전봇대’, 그리고 야구선수 이야기를 다룬 트리트먼트를 한데 섞어보자는 데서 출발했다. 장르적으로 멜로이고 또 음악적 아우라에 많이 기대고 있는 통속적인 멜로 코드를 갖고 있지만 이걸 보고 절대적 멜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중이 알고 있는 멜로와는 조금 다른 걸 만들려고 했다.

10년을 한결같이 한 남자만 바라보는 여자라는 캐릭터는 이 로맨틱코미디가 지닌 야심에 비추어 너무 전형적이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았는지.

외피적 성향이 쉬우면 쉬울수록 좋은 영화이기 때문에 그런 캐릭터가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첫눈에 딱 와닿는 통속적 캐릭터는 내 작품에서 더 유리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에서 조금씩 엇깎기를 하면 효과적이니까. 작품을 더 재밌게 풀 수 있는 방법이다. 관객이 만나보지 않은 캐릭터를 만들면 생소해서 이렇게저렇게 만든 놀라움이 반감될 것이다.

영화 초반의 핸드헬드가 집중을 방해할 정도로 화면을 흔든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데.

비정상적인 그의 심정들, 현실적이지 않은 그의 심정을 보여주기 위한 촬영 컨셉으로 잡았던 것이다. 단순한 플롯과 구성에서 사람의 호흡으로 이들을 쫓아가는 건 영리한 선택이 아닐까. 그런데 핸드헬드는 기술적 테크닉 안에서 굉장히 많은 사양이 있다. 그 매뉴얼을 정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간 것이 약간 시행착오가 아니었나 싶다. 모니터로 볼 때 감이 좋았는데 큰 스크린으로 보니까 좀 과잉으로 느껴졌다. 핸드헬드는 약물처럼 수치가 있는데, 특정 감정을 위해 얼마만큼 흔들려야 하는가 하는 수치가 있는데 공정 과정에서 정확한 데이터를 뽑지 못했다.

판타지를 주면서도 판타지를 깨려는 이중의 욕망이 느껴진다.

판타지를 주려고 한 건 맞다. 그런데 단순히 현실에서 어긋난 비현실적인 것에서 판타지가 나오는 건 아니다. 갑자기 전봇대에서 불꽃이 튄다고 판타지가 되겠나. 판타지가 나오려면 리얼리즘에서 갈증을 느끼고 판타지를 그리워하게 만들어야, 그래야 미약하게 만들어도 갈증을 풀어줄 수 있다. 대체로 효과적이었지만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이 뭘까.

그걸 어떻게 해석하려고 하고 정의내리고 할 수 있는 거냐고 말하려는 게 이 영화다. 짐작할 수 없는 순간에, 알 수 없는 여자가 내게 다가와 어느 순간 특별한 여자가 되는 게 사랑 아닌가.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