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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의 원형을 만나다, 이케다 리요코 단편집

열정은 다락방에 산다. 마당에 있는 누군가를 훔쳐보면서 태어난다. 사랑은 가지를 뻗는다. 그 팔은 반드시 불륜에 걸린다. 시기는 그 모든 것들의 밑바닥에 있다. 지하실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면, 종유석이 숲을 이룬 동굴에 숨어 있으리라. 일본 소녀 만화의 1970년대는 그야말로 굉장했던 때다. 비극적 연애, 처절한 도전, 혁명에의 동경과 같은 극단의 감정에 뒤섞여 있던 시절을 통과한 그 시대 만화가들의 미래 역시 결코 평탄치는 않았다.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된 어떤 만화가만큼은 아니지만, 만화가의 펜을 꺾고 뒤늦게 성악가로 살아가고 있는 이케다 리요코의 모습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혹은 <오르페우스의 창>의 주인공들과 겹쳐서 볼 수밖에 없다.

이케다의 팬들은 그녀가 영원히 만화가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케다 단편집>(대원씨아이 펴냄)이 뒤늦게 국내에서 발간되어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는데, 대작에서는 찾을 수 없던 그녀의 독특한 면모를 발견하는 재미가 결코 적지 않다.

2권까지 발견된 단편집의 핵심은 제1권이다. 여학교 안에서의 묘한 시기와 질투, 예전에 사귀었던 연상의 여자와 임신 중인 부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4대에 걸친 근친연애의 비극, 과대망상증에 걸린 한 여자의 비극적인 생애…. 모든 이야기들은 연애에 걸려 있고, 그 연애는 기묘한 방식으로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그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의 감정은 사랑 자체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지독한 집착에서 생기는 시기,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늘한 공포다.

1970년대 일본 여성들의 생활과 생각들이 이들 작품 속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다. 만화 속의 여자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결혼을 하더라도 일자리를 꾸리며 자아를 펼치고자 하는 또렷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패션이나 광고와 같은 시대의 아이콘에 대해 섬세한 관심을 표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자들은 뒤로 물러선다. ‘사랑하는 한 남자’에 절대적으로 집착하고, 이로 인해 우정을 깨고 생애 전체를 위태하게 만든다. 그 테마들은 오늘에도 변하지 않고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30년이나 묵은 이들 작품이 오늘날의 주말연속극과 멜로영화들보다 훨씬 깊이있고 세련되게 이러한 감정들을 직조해내는 일이 놀라운 것임엔 분명하다. 작품들은 물론 부족하다. 감정의 과잉도 있고, 방만한 개그도 있다. 허술한 것이 한두 가지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많은 작가들에게서 결여된 치열함을 발견하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manam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