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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궁전의 시대여
2001-06-13

<투발루>의 영화적 장치들과 숨은 의미찾기

● 한 더벅머리 젊은이가 베를린영화제를 알리는 공식 포스터 위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붙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만든 단편영화를 선전하는 포스터. 몇년 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첫 장편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영화를 보러

온 관객에게 기념으로 풍선과 필름조각을 나눠주었다. 이 엉뚱한 젊은이가 당시 32살의 바이트 헬머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데이 포

나이트>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를 결심했다는 이 청년 감독은 <창문청소부>(Der Fensterputzer, 1993), <놀랬지>(Surprise,

1995) 등의 단편영화를 통해 국제영화제를 휩쓴 독일영화계의 ‘신동’이기도 하다. 50여 차례 수상을 한 <놀랬지> 이후 코카콜라

등의 광고를 제작하기도 한 헬머의 첫 장편영화인 <투발루>는 역시 엉뚱하게도 한 수영장에 얽힌 한편의 동화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도시, 사방에서 물이 새고 천장에선 돌이 떨어지는 황폐한 수영장이 핵전쟁 이후 같은 폐허 한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다.

건물 밖 세상으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지만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안톤은 눈먼 아버지를 위해 수영장을 살리려고 주위사람들과 함께 애를

쓰고, 또다른 아들인 그레고어는 수영장 자리에 최신식 건물을 짓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우여곡절 끝에 수영장 폐쇄를 막는 데 성공하지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자 안톤은 허물어져 가는 수영장을 뒤로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투발루 섬을 향해 떠난다.

움직이는 카메라 속 무성영화의 향취

한 인터뷰에서 헬머는 영화의 주공간인 수영장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사라져 가는 곳에 대한 향수”라고 말했다. 영화의 영감을 준 곳은 우연히

방문했던 함부르크의 한 수영장이었는데, 한때의 화려함과 번성을 뒤로 하고 이젠 시류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너무나도 크고 낡은 수영장의 아련함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안톤과 에바가 헤엄치는 이 수영장은 무성영화라는 구약적인 영화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일종의 거대한 자궁

같기도 하다. 향수와 애상이 넘실거리는 이 공간에서 바이트 헬머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는 두 형제과 <소년, 소녀를 만나다2>

같은 에덴의 동쪽 설화를 뼈대 삼아 아기자기한 이야기의 집을 지었다.

<투발루>의 가장 큰 매력은 <투발루>의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이야기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적

장치들에서 온다는 것이다. 먼저 바이트 헬머는 무성영화 시절 시간과 장소의 구분 내지는 사실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흑백 필름에 직접 색을 칠하던

이른바 ‘틴팅’이란 기법을 차용했다. 이러한 기법 덕으로 투발루의 밤장면은 푸른색을, 실내장면은 갈색을 띤다. 인물들간의 대사는 단지 몇 마디의

외침으로 축소되고, 이로 인해 배우들의 연기는 필연적으로 과장이 되는데 이 모두는 영화가 막 걸음마를 배우던 무성영화 시절의 기법들임은 물론이다.

대신 <투발루>의 카메라 연출과 움직임만큼은 각종 부감과 앵글숏으로 상당히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투발루는 움직이는 카메라라는 그릇에

무성영화의 향취를 담아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수백만년 전에 멸종된 공룡을 부활시킨 디지털 기술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렇게 고색창연한 아날로그 기술에 대한 바이트 헬머의

관심은 영화 속 수영장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95년 <놀랬지>를 찍기 전 그는 같은 영화학교 선배이자

독일 ‘뉴저먼 시네마’ 기수인 빔 벤더스의 조감독으로 일을 한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Die Gebru위에

움라우트der Skladanowsky, 1995).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전기영화인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는 독일 출신으로 뤼미에르

형제보다 일찍 영화를 발명했던 독일영화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벤더스는 영화탄생 역사를 프랑스에 빼앗겨버린 이 독일 형제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던 수단들을 이용해서 영상에 담으려 했다. 그는 흑백과 무성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손으로 구동되는 카메라를

갖고 영화를 촬영하여 무성영화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까지도 그대로 재현해 내었다. 이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헬머는 언어라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초기 무성영화 시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윽고 ‘영화적인 것’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벤더스와의 작업 직후에 제작된

단편영화 <놀랬지>는 무성영화적인 채색 기법에 바탕을 둔 슬랩스틱 코미디로서, 그의 영화매체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미 <투발루>에서 사용된 다양한 무성영화적 기법들을 일괄하고 있다.

<투발루>에서 보게 되는 무성영화적 기법들의 실험적인 사용은 결국 <투발루>의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한 수영장에 대한 진혼곡조의

동화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영화로 그 의미를 확대생산하기에 이른다. 헬머 스스로도 <필림 차이테>와 인터뷰에서 수영장과 극장의 공통점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전의 독일 극장들은 집 거실에서 TV를 보는 것과는 다른, 관객을 압도하는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초호화판으로

세워졌고, 그래서 흔히 ‘궁전’이란 이름을 달기를 좋아했었다(예를 들면 베를린의 극장 ‘조 팔라스트’는 동물원 궁전이라는 뜻이다). 시민들이

일상을 벗어나 화려한 꿈을 꾸던 곳이었던 이 극장들은 DVD와 멀티플렉스로 대변되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영화 속 수영장처럼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라져간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곳은 그래서 아직 자본과 이윤과 구조조정으로 대변되는 ‘현대성’의 신화 대신 꿈과 낭만이

남아 있는 곳이 된다. 그래서 수영장을 지키는 늙은 검표원 아낙네는 동전 대신 단추를 내미는 손님들을 아무 말 없이 들여보내고, 현대성의 화신이랄

수 있는 발권 로봇은 시류의 물결을 거부하는 아버지 칼의 분노에 찬 발길질에 밀려 수영장 밖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수영장을 구하기 위해 펼쳐지는

안톤과 그의 친구들의 노력 역시 현실적인 조처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상상력에 근거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지붕에 새어 들어

오는 빗물을 안톤의 친구들이 우산을 받쳐 막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는 맹렬한 빗줄기로부터 꿈의 세계를 지키기에는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우산은 결국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 될 뿐이다.

혁신적인 퇴보를 이루다

사라져가는 꿈의 궁전에 대한 낭만적 향수는 무성영화적 기법들을 통해 비로소 한때 그곳을 가득 채웠을 영화들에 대한 애정어린 회상이 된다. 더욱이

이러한 회상은 독일영화라는 맥락에서 좀더 강렬한 복고주의적 향수를 띠는데, 왜냐하면 무성영화 시기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

<마지막 웃음> 등으로 대변되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독일영화의 전성기와 엇물려 있기 때문이다.(굳이 여기서 독일 표현주의란

말 대신 독일영화란 표현을 쓴 것은 독일 영화학자들은 <노스페라투>나 <마지막 웃음>이 독일 표현주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벤더스의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처럼 <투발루> 역시 독일영화의 한때

찬란했던 과거에 대한 애정어린 헌사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투발루>는 사라져가는 전설로서의 수영장이나 극장에 대한 이야기나 무성영화에 대한 애정표현을 넘어서서,

최근 독일영화에 대한 비유로 읽어낼 수도 있다. 어찌보면 수영장 주인인 눈먼 아버지 칼은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들은 아닌가? 한때 “낡은 영화는 죽었다”던 패기에 찬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서 이룩된 ‘뉴저먼 시네마’의 성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화려함을 잃어버리고 관객마저 외면하게 된다. 그런데도 세월이 흘러 이제는 스스로 기성 영화인이 된 한때의 기수들은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기엔 너무 늙어버렸거나 방향을 상실해버렸다. 한편 ‘기술, 체계, 이윤’을 외치며 낡아빠진 수영장을 부숴버리려 하고 마침내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아들 그레고어에게서는 “클루게, 파스빈더류의 낡은 영화는 죽었다”고 외치며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애정을 공공연하게 표명한

독일 젊은 영화인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비유마저 엿보인다. 60년대 초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며 새로운 영화에 대한 신념에 차 자신들의 아버지를

정신적으로 타살한 ‘뉴저먼 시네마’. 이들의 오이디푸스 궤적은 90년대에 와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아이들에 의해 다시 한번 반복된 것이다.

최근 독일 신문들은 독일영화들이 사회적 맥락이 의도적으로 제거되고 모든 잠재적인 갈등요소들이 거세된 피상성을 특징으로 하는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집중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래서 라인강의 기적이 한창이던 50년대, 과거의 아픈 상처와 죄의식을 깊숙이 묻어버리고 독일인에게 대신 목가적인

전원생활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한 독일적 장르영화인 ‘향토영화’(Heimatfilm) 이래 최악의 장르영화라는 비판이 현대 독일영화들을 향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은 그동안 텅 비었던 극장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한 관객에 의해 점점 더 설자리를 잃고 있는 형편이다(전주영화제에서

주최한 ‘파스빈더 회고전’에서 만난 독일의 저명한 평론가 한스 귄터 플라움은 이 점을 몹시도 안타까워했다. 독일 영화학교에서 파스빈더의 영화를

젊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며 독일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한바탕 한탄을 늘어놓았다).

또 일부 영화들은 일견 ‘시간’, ‘운명’, ‘우연’ 등과 같은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러한 것을 천착한다기보다는

이를 게임서사의 형식에 담아 테크노 음악의 선율에 실어 유희할 뿐이다. 남자친구를 살리기 위한 돈을 구하려고 죽어라 뛰어다니는 롤라의 이야기를

경쾌한 테크노 음악과 현란한 카메라와 편집을 통해 재치있게 펼쳐보인 톰 티크베르의 <롤라 런>도 이런 맥락에서 별반 다른 점이 없다.

헬머의 <투발루> 역시 독일 현지 언론에 의해 디지털 영상이 난무하는 요즘 복고적 실험을 통해서 ‘혁신적인 퇴보’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설정과 유사 상징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러한 해석들에 확신의 무게를 부여할 만한 주제적 일관성은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투발루> 역시 과도한 형식주의를 통해서 이야기의 부재를 덮어버리려는 현재 독일영화의 흐름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착역은 발견했나

그래서 궁극적으로 독일영화의 미래는 절망적인가? 아버지의 세계를 지키려던 안톤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무너진 폐허더미

위에 주저앉아 좌절하지 않고 수영장의 모터를 단 배를 타고 투발루를 향해 출발한다. 영화 속의 투발루는 희망에 찬 미지의 세계가 되겠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현실세계로서의 투발루는 최근 ‘tv’라는 자국의 인터넷 표식을 거액을 받고 한 TV방송사에 팔았다고 한다. 영화와

함께 접한 이 소식은 여러 모로 투발루의 마지막 장면에 불길한 징조를 품게 한다. 인터넷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구촌 시대에는 이제 더이상

희망과 동경의 대상이 될 미지의 세계는 존재하질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그러한 세계 또한 오직 디지털화된 가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

될까? 아니면 독일영화의 궁극적인 미래의 종착역은 TV나 인터넷이 되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의 안톤은 아직 항해중이다. 진지한 예술과

오락, 의미심장한 주제와 현란한 형식이란 방위를 가진 나침반에 의지한 채 현대 독일영화의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남완석|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