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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로 뿜어나오는 피의 향연, <피의 결혼식>

Bodas De Sangre 1981년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출연 안토니오 가데스

EBS 7월10일(토) 밤 11시10분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영화로는 <사냥>(1965), <까마귀 기르기>(1976) 등이 최고작으로 꼽히곤 한다. 정치적인 비유, 형식적 균형미가 이 영화들에서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사우라 영화 중에서 <탱고> 같은 작품에 더 애착이 가곤 한다. 별다른 드라마 없이 춤과 음악에 집중하면서 이처럼 근사한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음이 놀랍기 때문이다. 1980년대 사우라 감독은 이른바 ‘플라멩코 3부작’이라 칭해지는 영화를 연이어 만들었다. <피의 결혼식> <카르멘> 그리고 <마법사를 사랑하라> 등으로 이들 역시 완성도가 빼어나다.

<피의 결혼식>은 별다른 내러티브가 없다. 무용수들이 등장해 춤을 추고, 악사들이 노래하고 연주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줄 뿐이다. 결혼식 날 아침, 어머니는 신랑이 결혼예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는 중이다. 어머니는 신랑이 칼을 가진 것을 발견한다. 놀란 어머니는 칼이 비극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랑은 칼을 무기가 아니라 좋은 목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하객인 레오나르도는 누군가에 대한 욕망을 은밀히 지니고 있다. 잠시 뒤 신부가 결혼예복 차림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의 춤이 시작된다. 사랑에 눈이 먼 레오나르도와 신랑은 목숨을 걸고 신부 앞에서 죽음의 춤을 춘다.

1970년대에 사우라 감독은 스페인 내전과 정치적 억압에 관한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이런 성향이 변하게 된다. 좀더 예술적 관점에 충실한 작품을 만든 것이다. 감독의 관심은 좀더 개인적인 심미안으로 기울었으며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플라멩코’이다. 스페인의 전통예술인 플라멩코는 정열적이고 즉흥적인 춤,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양식미와 화려함을 고루 지닌 예술형태로 알려지고 있다. <피의 결혼식>은 전적으로, 플라멩코를 위한 영화이다. 영화 속 공간은 거의 변화가 없이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여기서 집단적으로 추는 춤, 그리고 복잡한 리듬이 영화를 끌어가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안토니오 가데스 등 플라멩코 무용가로 이름을 날린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데 이들의 춤은 가히 황홀경이라 표현할 만하다. 결혼이라는 의식, 그리고 이를 둘러싼 질투와 사랑의 대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싹트는 살인의 모티브 등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이같은 치정극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향하는 운명적인 항로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탱고와 플라멩코의 춤과 무용극이 대부분 피냄새 섞인 비극으로 향하곤 했듯 말이다.

<피의 결혼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현대적인 무용을 어떻게 영화 매체에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의 결과물이라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한없이 지루할지 모르지만 무용과 음악, 그리고 영화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혹시 알모도바르 감독과 안무가 피나 바우쉬, 그리고 음악가 카에타노 벨로수의 환상적 만남이 성사된 <그녀에게>(2002)에 호감을 가졌던 이라면, 이 영화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 될 만하다.

김의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