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센테니얼 맨>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는 평론가들을 본 적 없지만, 전 그 영화가 과연 그렇게까지 나쁜 영화였나 종종 생각해봅니다. 아, 물론 이 영화가 크리스 콜롬버스식으로 대책없이 감상적인 영화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어요. 로빈 윌리엄스도 우리가 수도 없이 보아왔던, 기술적으로는 좋지만 왠지 모르게 뻔한 바로 그런 연기를 보여주고요.
하지만 이 영화가 아시모프의 원작에 불충실하다는 주장에는 아주 동감할 수 없군요. 물론 아시모프의 원작에는 로봇이 연애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지만 과연 이 영화의 로봇 앤드루가 연애를 한다고 해서 원작을 그렇게 배반하는 것일까요?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오히려 아시모프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고 하겠어요. 로봇 연애담은 결과적으로 뻔해 보이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선택은 아니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잠시 불멸의 수잔 캘빈 박사인 척하면서 앤드루의 심리를 검토해보기로 하죠. 앤드루는 왜 그렇게 인간이 되고 싶어했을까요? 소설 속에서는 자긍심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끝도 없이 인간을 모방하려는 앤드루 마틴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부족해요. 꼭 인간의 소화기관까지 모방할 정도로 집착하지 않아도 로봇의 자긍심을 세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로봇 3원칙으로 해결됩니다. 자, 영화 속의 작은 아씨는 앤드루를 몰래 사랑하고 있습니다. 앤드루도 그걸 어느 정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작은 아씨는 결코 로봇에게 감정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은 남자를 만나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은 결혼생활을 해야 했지요. 결국 작은 아씨는 앤드루를 선택하지 않으면서 불행해진 셈인데, 제1원칙에 따르면 앤드루는 결코 그걸 방치해서는 안 되지요. 인간이 해를 입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작은 아씨 때야 자기도 잘 모르고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만 작은 아씨의 손녀인 포샤와 얽힌 똑같은 설정이 반복되었을 때도 과연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어림없죠. 앤드루에게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 인간을 로맨스의 대상으로 사랑하는 것은 모두 제1원칙을 철저하게 따르는 과정이었던 겁니다. 앞뒤가 딱딱 들어맞아요. 인간과 로봇의 로맨스가 감상적이라고 하지만 따지고보면 영화는 원작보다 더 차갑고 논리적이에요. 단지 그 논리가 감상적인 연애담 속에 숨어 있어서 찾기가 힘들 뿐입니다.
소설을 각색한 니콜라스 카잔도 그걸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겠군요. 이 사람이 그렇게까지 3원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결말부분만 해도 로봇 하나는 제1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당연한 듯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작가가 모른다고 해서 그런 논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숨은 논리를 찾는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시모프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바이센테니얼 맨>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평론가들과 함께 야유를 퍼부었을까요, 아니면 저처럼 평론가들이 놓친 무언가를 찾아내며 즐거워했을까요? 아무도 알 수 없죠. 영감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이렇게 궁금해 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아쉽기만 하군요.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