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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셔츠상자 속 러브레터들, <러브레터>
2001-06-13

(Love Letter)

“잘 지내고 있나요?

E-mail은커녕 휴대전화나 무선호출기도 흔치 않던, 10년도 넘게 지나버린 시간 속의 그녀. 그래서 이젠 와이셔츠상자 속에 갇힌 추억의 편지로 남아버린 그때 그 사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신 술 때문일까? 소란스럽게 찾아낸 먼지가 뽀얗게 쌓인 와이셔츠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녀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들추어본다. 학보를 말았음직한 리포트 용지에 쓰여진 글귀들, 각양각색의 편지지들, 함께 본 연극티켓, 예쁜 크리스마스카드, 카페의 메모지들…,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했고, “방금 헤어졌지만 다시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도 한다. 그녀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이야기하다가도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술기운으로 붉게 충혈된 눈자위 위로 그녀의 모습이 그리고 함께한 수많은 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때 나는 그녀 안에 있었다.

사랑의 시간들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하얀 웨딩드레스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사랑이건 서로에게 아쉬움만 남긴 채 돌아서게 만드는 슬픈 사랑이건 간에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앙코르와트의 유적에 몰래 묻어두어야 할 마음속의 비밀을 남기고 내게는 술로 팽창된 멜랑콜리를 어루만져줄 러브레터가 가득한 와이셔츠상자로 남았다.

“오겐끼데스까”라는 대사로 전설이 되어버린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처음으로 대한 것은 1997년 즈음이었고,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비디오테이프을 통해서나 겨우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갓 PD로 입봉, 단막극을 연출하고 있던 때였다. 언제나 새로운 이야깃거리에 목말라 하던 나에게 <러브레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저렇게 작은 이야기도 영화가 되는구나.” 게다가 자유분방하면서도 정확히 리듬을 탈 줄 아는 카메라 워킹과 편집, 서정적인 음악 그리고 순정만화 주인공을 보는 듯한 등장인물 등 관객뿐만 아니라 젊은 감각을 지닌 연출자들의 눈을 멀게 할 만큼 매력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영화였다. 누군들 닮고싶지 않았을까. 나는 테이프를 수십번씩 되돌려가며 특정 장면들을 보고 또 보고, 심지어는 콘티를 따라 그리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전작들을 찾아보면서, 뮤직비디오로, 단편드라마로 경험을 쌓아온 이와이 순지 감독의 감각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영화들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을 아우르는 감독의 감수성이라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다.

다시 와이셔츠상자 이야기로 돌아가보건데, 그 와이셔츠상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때로 통속적인 물음을 내게 던진다. 결혼하면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과거를 끌어안고 사는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다는 충고다. 그러면 나 또한 자신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할 거냐’고. 그렇다고 어쩌면 내 인생의 기록이기도 한 러브레터를 한낮 무책임한 불씨에 맡겨버릴 수 없는 일 아닌가. 차라리 내일부터 그녀를 찾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러브레터>에서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에게 그녀의 과거와 사랑을 되돌려주듯 나도 그녀에게 과거의 시간과 감정을 되돌려주고 나 자신의 과거를 되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드는 걱정, 그녀의 가정이 망가질 수도 있을까?, 신중해야 한다. 이 문젠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러브레터>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후지이 이츠키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러면서 자신을 닮은 또다른 후지이 이츠키의 존재를 알게 된 히로코가 죽은 이츠키의 어머니를 찾는 장면이다. 히로코는 만약 후지이가 자신을 그녀 대신으로 생각했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눈물짓는다. 죽어버린 사람을, 그것도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를 상대로 말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와이셔츠상자 속 러브레터의 주인공은 1991년 초 내게서 떠나갔다.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조그만 도넛 가게에서 나는 그녀를 평생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지금은 내 감수성의 토양이 되어 있는 그녀에게 바보처럼 말이다. 사랑이라는 게 정말 이것뿐일까?

<러브레터>는 이와이 순지 감독이 내게 보낸 러브레터와 다름 아니다. ‘자신의 감수성을 믿고 계발하라’는. 그래서 술김이기는 하지만 오늘도 와이셔츠상자들을 소중하게 들쳐본다. ‘근데 E-mail이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는 어디에 넣어두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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