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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 비판받아야 한다

얼마 전 서울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는 그저 ‘법리’에 따라서 판결을 내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꼴보수적인 대한민국 사법부에 제정신 가진 사람이 적어도 한명이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의 말대로 이는 대한민국 “사법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명판결”이다. 이 판결을 보며 혹시나 이제는 다를까 했더니, 역시나 아직도 아닌 모양이다.

‘아웃사이더’의 임성환 대표한테 전화가 왔다. 양심의 이유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그는 곧 감옥에 갈 예정이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양심의 자유보다 국방의 의무가 앞선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그 체제를 물리력으로 수호하는 게 국방이라고 할 때, 국방을 위해 양심의 자유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본말이 전도된 이 사법적 도착증은 몰상식을 넘어서 파쇼적이기까지 하다.

전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여섯 나라. 그 후진국가의 첨단에 당당하게 대한민국이 서게 된 것은, 군부독재 시절부터 정의 아닌 불의 편에 서서 민중의 폭압기구 노릇을 하고도 반성 한번 없었던 대한민국 사법부의 후진성 덕분이다. 이분들 덕에 우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국방 신을 모신 군국주의 국가에 살아야 한다. 아직 헌재 판결이 남아 있다 하나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MBC 〈PD수첩>에 공문(?) 비슷한 것을 넣은 모양이다. ‘송두율과 국가보안법’이라는 프로그램이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신중한 제작을 요구했다고 한다. 언제부터 대법원이 방송에까지 간섭할 권리를 갖게 됐을까? 이왕 관심 가진 김에 앞으로는 짬짬이 연속극 평도 부탁한다. 내가 이 사건에서 해괴하게 여기는 점은, 그들이 방영자제의 근거로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송두율 재판은 반공주의자들이 벌이는 인민재판이다. 이 재판은 어차피 알고리즘에 따라 진행되는 기계적 재판이다.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다. 그런데 왜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마치 이 재판의 결론이 아직 열려 있는 듯이 말하는 걸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재판정 안이 아니라 재판정 밖. 어차피 지나가던 개가 웃든 말든 그들은 유죄는 때릴 것이고, 거기에 대한 밖의 비난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리라.

대한민국 헌법은 제법 진보적이다. 하지만 헌법만 진보적이면 뭐 하는가? 어차피 법은 해석의 문제, 헌재의 판결이 보수적이라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최근 헌재는 이라크 파병에 관해 “통치행위”라며 법적 판단을 회피해버렸다. 대한민국 헌법은 침략전쟁을 부인한다. 그렇다면 헌재가 할 일은 이라크 전쟁이 침략전쟁인지 여부에 대해 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뿐. 하지만 판결문 어디를 봐도 여기에 대한 판단은 없다.

침략전쟁도 “통치행위”라면 가능하다는 얘기일까? 동네애들 패싸움도 아니고, 세상에 통치행위 아닌 침략전쟁도 있는가? 일제의 태평양전쟁도 통치행위요, 나치의 폴란드 침공도 통치행위다. 대한민국의 “통치행위”는 헌법을 초월해도 된다는 말일까?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할 때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했지 언제 “헌법을 초월하겠다”고 했던가? 헌법을 무시한 행정부와 입법부에 면죄부나 주는 게 사법부의 임무인가?

사법부가 인권의 보루가 되기는커녕 외려 인권탄압의 앞잡이로 나섰으니, 할 수 없이 이 문제의 해결은 입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헌법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담아놓으면 뭐 하는가? 하위법으로 부정하고, 판결로 배신하면 그만인 것을. 대한민국을 다스리는 실제의 헌법은 한-미동맹, 반공주의, 병영사회의 이념. 행정부도 비판을 받고, 입법부도 비판을 받고, 권력의 제4부라는 언론도 비판을 받는 세상. 오직 사법부만 비판에서 벗어나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법 비판이 필요하다.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