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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인의 아픔, <릴리 마를렌>

<릴리 마를렌> Lili Marleen 1981년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출연 한나 쉬굴라

EBS 8월14일(토) 밤11시10분

파스빈더 감독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그의 평전을 쓴 인물조차 “일관성이라곤 없는 감독”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1982년 세상을 뜨기까지 파스빈더 감독은 다작을 하는 감독이자 ‘뉴저먼 시네마’의 대표 감독, 그리고 다분히 자학적이라 할 만큼 기이한 삶의 행적을 보인 인물이기도 했다. 출연배우에게 가학적인 행위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양성애자였던 사실은 파스빈더에 관한 일화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감독이었지만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깊은 호감을 품었던 파스빈더는 할리우드영화에 대해서 유일하게 관심이 가는 장르라고 논한 적 있다. 성과 정치적 주제, 그리고 장르영화의 핵심어들은 파스빈더 감독을 설명하는 합당한 길이 될 것이다.

<릴리 마를렌>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스위스 한 마을에서 독일인 빌키(한나 쉬굴라)는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빌키는 스위스인 음악가 로베르토를 어느 날부터 사랑하게 된다. 아들이 독일인과 만나는 것을 반대한 로베르토의 아버지는 빌키가 스위스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손을 쓰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빌키는 가수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녀가 전에 노래를 불렀던 음반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일약 스타가 된 것이다. 빌키는 나치의 비밀경찰과 엮이게 되지만 어려움을 겪고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릴리 마를렌>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1982)과 흡사한 구석이 있다. 남들에게 주목받는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배경을 깔고 있다는 점, 그리고 멜로드라마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논할 수 있다. 사실 파스빈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영화들은 장르면에서 멜로드라마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8)이 모두 그렇다. 평소 파스빈더는 “멜로드라마는 올바른 영화다. 그러나 미국적인 멜로드라마는 감정 외엔 도무지 아무것도 남겨놓질 않는다. 난 관객에게 감정뿐 아니라 그것을 분석하고 반추해볼 여지를 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장르영화로서 멜로드라마를 취하되 전쟁이라는 끔찍한 시간을 통과하는 독일 역사, 그리고 정치적 뉘앙스를 영화에 스며들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파스빈더 영화를 논할 때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영향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조명이나 의상 같은 화려한 외양을 강조하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릴리 마를렌> 역시 더글러스 서크 영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릴리 마를렌>은 진부하고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이란 것은 사회적 억압을 가하기 위한 가장 교활하고, 가장 효과적인, 최선의 수단이다”라는 파스빈더의 철학은 깊고도 어두운 그림자를 작품에 남겨놓곤 했으며 <릴리 마를렌> 역시 감상적인 영화라고 보긴 힘들다.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의 여주인공이 그렇듯, <릴리 마를렌> 속 여성 역시 시대의 절절한 아픔과 고통을 스크린 밖으로 토해내고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