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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공포영화, <분신사바>의 4가지 결점

<분신사바>는 주문(呪文) “분신사마, 분신사마, 오이데쿠다사이.”(분신(分身)님, 분신(分身)님, 와주세요)에서 소재를 딴 영화이다. “고립된 마을의 집단적 공포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감독의 변이 아니더라도, 영화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박해’를 민망할 정도로 읊조린다. 그러나 영화 속의 소외와 폭력은 분신(焚身)으로 전시(展示)될 뿐, 전혀 실감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허점투성이, 공갈빵’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측면: 소외에 대한 몰이해, 상위 3%와 하위 3%가 같은가?

현재의 유진은 과거의 인숙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왕따’이다. 그녀는 가해자에게 복수하고자 귀신을 부른다. 유진의 몸에 덧씌워진 인숙의 영은 아이들을 죽이고, 유진 모녀에겐 과거의 인숙 모녀에게와 같은 ‘추방령’이 내려진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이자, 공포장면의 핵심인물 유진은 ‘29번 김인숙’과 어떤 상동성을 지니는가?

그녀는 ‘왕따’라고는 하나, 인숙과 다르다. 그녀는 ‘유진 모녀’로 불릴 수 없는, 엄연히 ‘아비 있는 가정’의 딸이다(“어제 아빠한테 혼났잖아”). 타지를 6번이나 옮겨다니다 흘러흘러 들어온 인숙 모녀와는 달리, 어미는 당당한(?) 현지인으로, ‘서울’이라는 대표 지역에서 이사왔으며, 상당한 부자이다. 유진 아비의 직업은 안 나오지만, 경제력으로는 지역유지(?) 회의에 낄 법하다. 유진의 눈은 인숙의 눈과 달리 “뒤통수치면 튀어나올 것 같은” 맑고 크고 아름다운 눈이다. 딸에 대한 관심을 미끼로 엄마를 성희롱하던 인숙의 선생과는 달리, 유진의 선생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담탱에게 일러봐. 요즘 담탱이 미술선생…”). 따라서 유진에 대한 ‘왕따’는 ‘선망과 질시’이지, 인숙에게 가해진 ‘혐오와 배척’이 아니다. 설/마/ 잘나서 왕따를 당하나, 못나서 왕따를 당하나 마찬가지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내세우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억압’은 완전히 잘못 이해된 개념이다. 여성이나 빈민이 소수자라 할 때, 이는 ‘쪽수’가 적다는 뜻이 아니다 (‘쪽수’는 더 많다). ‘대한민국 1%’라는 CF 문구는 ‘소수자’를 만들어 드리겠다는 말이 아니다. 결국 대한민국 1%밖에 갖지 못하는 그 차를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게끔, 그리하여 그것을 욕망하는 자가 ‘다수자’이게끔 해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수자’는 절대로 그런 차를 욕망할 수 없는 더 많은 사람들이다. 정규분포 곡선에서 상위 3%와 하위 3%를 잘라내는 방식의 ‘대중 파시즘에 대한 공포’를 논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계급 피라미드가 너무도 공고하다. 상위 20%는 사람(다수자)이고, 하위 80%는 사람이 아닌(소수자인) ‘20:80사회’를 논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학적 측면: 지방분권에 대한 무지, 70년대가 지방분권 사회?

과거사건과 아무런 상동성이 없는 유진은 (자아가 강해서 귀신에게 잠식당하지 않는다지만) 결국 ‘귀신의 탈것(vehicle)’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공포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는 ‘30년 전 사건’은 얼마나 내실이 있을까?

이 영화는 ‘1974년 분지마을’이라는 시공간을, 폐쇄적이며 집단폭력이 자행되던 곳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사료인 양 “박정희 대통령은 미신을 철폐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삽입한다. 이들이 무당 모녀를 배척하는 근거로 이용했을 법한 이 멘트는, 마을의 집단폭력은 하나의 알레고리일 뿐이며, 나아가 파시즘적 정치체제와 궤를 같이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든 박정희 정권이 혁파해나간 전근대적인 요소에는 미신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국 이후 실시되던 지방자치제는 군사혁명으로 폐지되고, 노태우 정권에 와서야 부활된다.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중앙집권제는 지방관을 모두 중앙에서 파견/임명하고 주민자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을 표준으로 삼는 도시와, ‘새마을’로 표상되는 농촌이 있을 뿐, 지역적 특성은 완전히 소거해나갔다.

그러나 영화의 ‘그 마을’은 모든 관료가 그 지역 출신이고, 마을 의회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완벽한 지자체이다. 경찰서장은 보안관 같고, 마을 분위기는 흡사 미국 19세기 서부의 어느 마을 같다. 급기야 불지르는 장면은 서양의 마녀사냥, 종교재판, 화형, 미국의 KKK단의 흑인 학살장면 등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마을은 우리 역사상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근대이전에도 서구나 일본에 비해 중앙집권화된 사회였다. 17세기에 속현과 향/소/부곡이 없어져, 모든 지방에 관료가 파견되고, 사형(死刑)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의 재가를 얻어야 했다. 동학이나, 해방 직후, 한국전쟁 같은 일시적인 무정부상태가 아닌 이상 분권화된 지방권력에 의한 사형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리 무리한 이야기를 해대는 걸까? 이는 국적불명의 영화를 기획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여고괴담>+<캐리>+<링>(학교, 무당 딸, 왕따, 새로 온 여선생// 왕따, 이상한 모녀, 얼굴에 피를 덮어쓴 여자// 치렁치렁한 머리, ‘낮은 포복’하는 귀신, 거울 보는 엄마 등)을 뒤섞어 ‘한·미·일 합작영화’를 만든 것 같다. 무국적성이 다국적성으로 오인받고 있다.

존재론적 측면: 귀신 개념의 불확립, 빙의와 환생은 다르다

호러는 호러일 뿐, (사회적/역사적) 딴죽 걸지 말자고? 좋다. 장르가 호러인 만큼 귀신에 대한 개념이라도 명확해야 할 텐데, 영화는 귀신론마저 취약하다. 호러와 SF가 흥미로운 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유사하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귀신/괴물/외계인/사이보그/복제인간/돌연변이 등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상대화시켜 보여준다. 다른 장르가 인간의 내부에서 인간을 이야기한다면, 호러와 SF는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되비추는 장르이다.

이 영화는 귀신의 영/육에 대한 일관된 개념은커녕, ‘빙의’와 ‘환생’의 개념마저도 혼돈하고 있다. 귀신은 몸 혹은 물질성을 지니는가? 귀신은 시각적 환영(이미지)인가, 촉각적 실체인가? 인숙의 영이 유진의 몸을 “껍데기”로 썼듯이, 영화는 귀신에겐 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교장을 찌른 것은 은주가 아니라 춘희였다고(‘국과수’까지 춘희의 지문을 확인한다) 강조하듯이, 춘희는 몸을 지닌다. 영화는 인숙은 ‘빙의’가 된 것이고, 춘희는 ‘환생’을 한 것으로 달리 규정한다. 그렇다면 ‘빙의’된 인숙의 영이 유진의 영과 충돌하는 것과는 달리, ‘환생’한 은주의 몸은 춘희에 의해 전유되어야 하며, 은주의 영이 따로 존재해선 안 된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널 느끼고 있었어. 이제 그만 나가줘”라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춘희는 은주에게 “내가 너이고, 네가 나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은주의 몸은 춘희의 몸과 다르다. 만약 같다면 마을 사람들이 은주를 못 알아봤을 리 없고, ‘국과수’는 굳이 은주가 아닌 춘희의 지문이라고 밝힐 이유가 없다. 억지로 이해하자면, ‘환생’을 한 춘희에겐 또 다른 자아로 은주가 있었고, 처음엔 은주의 몸이었다가 사건도중(임신을 거치면서?) 춘희의 몸으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의 귀신은 완전히 영적이지도 물적이지도 않은 애매한 존재이다.

이 혼돈 속에서 그나마 의미있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춘희는 혼자서 환생을 했는데, 인숙은 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엄마의 재임신을 통해서만 환생할 수 있는가? 춘희는 여태껏 은주의 몸으로 살다가 왜 임신을 함으로써 다시 완전한 춘희(원래 엄마)의 몸으로 바뀌는가 등이다. 여성학적 고찰을 요하는 문제이다.

여성학적 측면: 모녀관계에 대한 반동, 딸은 어미의 분신(分身)?

영화는 ‘성상납’과 ‘남성들의 연대와 공모’를 말하는 등, ‘남성 중심사회 대 모녀’의 전선을 그으며,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펼치는 듯하나, 영화의 여성주의적 견해는 지극히 반동적이다.

영화의 그나마 독창적인 대목은 엄마가 거울을 통해 학교에 간 딸을 보고 그 영상을 딸의 뇌에 전송한다는 것이다.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딸의 정신세계는 엄마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독자적인 외부세계에 대한 관점(觀點)이 없는 딸은, 육체만 분리되었지 정신적으로는 태아와 같다. 그녀의 영혼은 엄마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독자적으로 환생할 수 없다. 그녀는 반드시 엄마에 의해 다시 낳아져야 한다. 엄마 역시 사제지간 같은 정신적 관계가 아니라, 반드시 ‘내 배를 통해서 낳는’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엄마라는 절대적인 지배자의 자리에 재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몸-정체성’을 수복한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영화 속에서 주어 섬기는 ‘소수자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노정하고 있는 ‘어떻게 엄마가 딸을 이다지도 철저하게 장악한다고 생각하며, 더욱이 이것을 모성애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이 바로 그녀의 진정한 나를 찾는 길, 즉 정체성 회복이라고 상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영화는 ‘분신사마’의 분신(分身)을 분신(焚身)으로 변용하고, 거기에 화형과 마녀사냥의 이미지를 결부시키고, 마녀사냥이 ‘왕따’ 현상의 확장판이었다는 것에 착안하여, 학교 ‘왕따’로 연결시키는 꾀를 내고 있다. 딸은 학교에서, 엄마는 마을에서 동시에 불타죽는 것으로 묘사되듯, 학교<마을<국가로 이어지는 소외의 사회학을 설파하고 있지만,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억압’이라는 문제의식마저 잘못 이해한 채, 반동적인 모성-이데올로기만 무시무시하게 전파하고 있다. 머리에 까만 봉지 쓰고 죽는 장면을 차용했음직한 기요시 감독의 <회로>에서 이미지만 따지 말고, 문제의식과 귀신관과 품위를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포(恐怖)영화가 아닌, 알맹이가 없는 공포(空胞)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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