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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존재’들의 러브스토리, <이노센스>
김도훈 2004-10-05

9년 만에 돌아온 <공각기동대>의 후속편. 눈이 시린 스펙터클과 퍼즐 같은 대사 속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어쨌거나 살아간다”고 되뇌인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덮고, 전자와 빛이 뛰어다녀도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는 정보화되어 있지 않은 근미래. <공각기동대>를 여는 이 한 문장으로 오시이 마모루는 다가올 멋진 신세계를 제시했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은 지금의 현실에 대한 예언서처럼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은 상상력의 발전속도를 손쉽게 능가해오지 않았던가.

2032년. 네트의 전뇌공간 속으로 쿠사나기가 사라져버린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인간의 모습을 한 소녀로봇(‘인형’이라 불린다)이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형들은 “도와줘요”라고 중얼거리며 자살을 감행한다. 고스트(영혼)가 없고 AI(인공지능)만이 탑재된 인형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공안 9과의 바트는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형들을 만난다. 기이한 종교적 색채를 지닌 축제에서 인간에 의해 불태워지는 인형들, 인간을 초월하기 위해 스스로를 시체로 만들어버린 인형들. 오시이 마모루는 이를 통해 여전히 “우리는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인형인 것일까”라는 오래고 낡은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는 여기서 다시 <공각기동대>를 반복하려는 생각이 없다. <이노센스>는 전작과는 달리, 활기찬 사이버-펑크 모험담의 쾌감이 아닌 누아르영화의 스산한 정서로 가득하다. 두려움 없는 에고이스트인 쿠사나기가 사라진 메트로폴리스에서 감독은 외로운 사이보그 형사 바트의 입를 통해 실존주의적 철학강의를 툭툭 던져댄다. 데카르트로부터 공자까지 온갖 인용으로 가득한 대사들 속에서 관객은 쉽게 길을 잃을 것이다. <이노센스>는 불친절하다기보다는 무뚝뚝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과잉된 3D 이미지들과 자아도취적으로 근사한 대사들이 관객을 살짝 짓누를 무렵, <이노센스>는 사뭇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바트는 사건의 진앙지인 인형의 제조사로 잠입해들어가고, 소년이 소녀를 만나듯, 그곳에서 바트는 쿠사나기와 만난다. 아마도 관객이 가장 바랐던 것은 그 짧은 순간이었을것이다. 쿠사나기는 “나의 네트에 접속하는 한, 나는 항상 네 곁에 있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며 또다시 사라지지만, “어디로 가볼까. 네트는 광대해”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지난날의 냉정함과는 다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상대를 배려해주지 않는 독불장군의 사랑고백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모두 함께 살아간다”는 오시이 마모루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노센스>는 질릴 만큼 거대한 외피를 둘러쓰고는 있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수줍은 (사람이 아닌)‘존재’들의 러브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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