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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선> 거제도 촬영현장 공개
2001-06-22

부활한 핏빛 상흔, 블록버스터의 옷을 입다

■ 배창호 감독의 액션미스터리스릴러 <흑수선>, 탄생에서 제작과정까지

“포로들은 줄을 서세요.”

철조망 사이로 돌멩이를 던지던 포로 100여명이 경비병들의 위협 사격에 우르르 흙바람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방금 전 가열차게 돌을

던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빨간 메가폰에서 흘러나오는 지시에 따라 차례대로 줄을 서는 모습이 양순하기 그지없다.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위치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관. 한국전 당시 친공포로들과 반공포로들 사이의 대립과 소요로 젊은 피가 흩뿌려졌던 그곳에서, 배창호 감독의 신작

<흑수선>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 비극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는 이들은 당시 포로들의 나이와 비슷한, 거제공고

1학년생들이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제법 비장한 얼굴들을 하고 있지만, 컷사인이 떨어지면 그들은 그냥 귀여운 철부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거제시의 전폭적인 지원계획에 따라 동원된 이 어린 학생들은 촬영 짬짬이 땡볕을 피해 막사 안팎에 널브러져 있다가도, 안성기, 이정재, 이미연,

정준호 등 주연배우들이 눈에 띄면 너나 할 것 없이 한걸음에 달려가 사인을 요청했다. 기자의 취재수첩도 그 등쌀에 10여장이 뜯겨나갔고, 종이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교복 자락에 사인받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2 0 일 걸 려 지 은 세 트, 2 분 만 에 불 타

6월11일, <흑수선>의 촬영은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관에 마련된 세트에서 종일 진행됐다. 이날 촬영은 포로들의 일상생활과

남로당 스파이 흑수선의 위장잠입 모습, 그리고 포로들의 수용소 탈출 기도신이었다. 모두 한 호흡으로 가기 어려운 군중신이지만, 어린 엑스트라들과

스탭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두세 테이크 안에 감독의 오케이를 받아냈다. 그래서인지 촬영장의 배창호 감독은 얼굴이 벌겋게 타고 목이 쉰 채로도

즐거워 보였다. “카아아앗! 오케이! 더이상 안 나와.” 호쾌한 오케이사인은 이튿날인 12일 밤 폐교 화재신을 찍을 때도 어김없이 터져나왔다.

폐교 세트는 기존의 건물에 함석을 입힌 뒤 합판 외벽과 양철 지붕을 올려 50년대 분위기로 ‘리노베이션’한 것으로, 영화상에서는 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들이 숨어들어가 생활하다가 화재와 총격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다. 포로들과 무장 경찰들이 대치중인 극중 상황 때문인지,

곳곳에 대기중인 가스통과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현장에는 전날 포로수용소 낮신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람이 잠잠해진

뒤 점화가 시작됐고 재건축에 20일이 걸렸다는 이 세트는 단 2분 만에 검게 탔다. 무장한 채 포로들을 위협하는 전투경찰들, 불타는 학교건물,

청년단장의 선글라스에 비치는 불길. 밤새도록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밤 9시에 시작된 촬영은 자정 무렵 “새참 오고 있다”는 배창호 감독의

따뜻한 인사로 마무리됐다. “저렇게 빨리 찍으면서도 버리는 신이 하나도 없다”는 게 제작자 정태원씨의 감탄.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다운 노련함이

돋보이는 현장이었다.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 연출 계획이 처음 알려졌을 때, 그 작품이 40억짜리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근래 자전적인

영화 <러브 스토리>를 찍고 흥행에 실패한 뒤로도 한국인의 정서를 영상화한 <>을 3년에 걸쳐 게릴라식으로 완성 공개한

터라, 이제 그의 영화적인 열정과 자존심이 충무로의 ‘메인 스트림’과 화해하지 않고 또 못할 모양이라고 믿어버린 탓이다. 그런 배창호 감독이

90년대 흥행사 강우석 감독의 투자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비천무>를 만든 영화사 제작지원으로, 온전한 ‘대중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배창호 감독의 답은 의외로 단순 명쾌하다. “바로 지금 하고 싶은 영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히 언론은 나에 대해 드라마틱하게 쓰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꼬방 동네 사람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을 내놓은 80년대 최고의 흥행 감독에서, 90년대 가난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그리고 다시 주류로 돌아와 블록버스터를

찍고 있는 자신의 행보에서 변화의 동기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 진폭만을 과장해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배창호 감독은 “그때그때 하고 싶은

작품을, 어울리는 방식으로 찍었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흑수선>도 ‘당연히’ 지금 하고 싶고 할 필요를 느낀 작품이라서 하게 됐다고.

장르영화로 돌아왔지만, 작품 색깔은 전과 다르지만 “관객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배 창 호’ 란 이 름 만 으 로, 제 작 자 와 투 자 자 의 기 투 합

<흑수선>은 연쇄살인사건의 내막에 한국전의 상흔을 숨겨놓은 복합장르영화다. 오 형사(이정재)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다 50년

묵은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흑수선이라는 암호명을 썼던 남로당 스파이 손지혜(이미연)의 기록이다. 오 형사는 손지혜의 기록을 통해 피살자가

당시 탈출 포로 검거에 나섰던 청년단장과 지서 주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전향 장기수로 최근 출감한 손지혜의 옛 연인 황석(안성기)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사이, 손지혜와 함께 탈출하다 총살당했다던 인민대장 한동주(정준호)가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해 사건 발생 무렵 방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들 모두 연쇄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지만 범인은 라스트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전이라는 배경으로 젊은

관객에게 무겁고 고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영화는 ‘누가 범인이냐’를 함께 추적해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지속적으로 엇갈리면서 강도높은 액션과 애틋한 멜로의 에피소드들이 보조를 맞춰나갈 예정. 회를 거듭하면서 액션의 규모가 커지고, 멜로 요소가

추가되는 등 처음 시나리오와는 그 분위기와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까지 촬영한 오토바이와 자동차 추격신, 비오는 숲 속의 결투,

불타는 폐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총격신 등을 중심으로 제작발표회에서 공개한 약 5분 길이의 예고편은 감독과 배우들이 흡족해 할 정도로 화려하고

역동적이라, 1000컷에 달한다는 ‘완성품’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

<흑수선>에는 약간의 탄생 비화가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이명세 감독의 화려한 컴백을 도왔던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사장은 오래 전부터 다음 타자로 내심 배창호 감독을 점찍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한편 같이하자고, 내가 배 감독님을 쫓아다녔다.

전체적인 드라마를 보는 눈이 정확하시니, 물질적인 지원을 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태원 사장이 내민 첫 번째 카드는

만화 <신의 주먹>을 액션영화로 만들어보자는 것. 배창호 감독은 “너무 커머셜하다”며 난색을 보이다가, 한두달 뒤 <하이웨이>라는

영어 시나리오를 들고와 미국에서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밝혔고, 이에 정태원 사장이 한 미국 영화사로부터 제작투자를 받기로 했다. 진행에 가속이

붙는가 싶었던 지난 12월, 정태원 사장은 미국 LA에서 만난 배창호 감독으로부터 그 사이 한국에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며 건네받은

시나리오 <흑수선>에 반했다. “액션미스터리스릴러이면서도, 그 안에 우리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졌고 여기에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감독이 투자자로 의기투합하게 됐다는 것. 강우석 감독처럼 배우들도 ‘배창호’라는 이름만으로도 출연을

약속했고, 이후 캐스팅과 헌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3월 중순 크랭크인하기에 이르렀다. 제작 규모 40억원으로 출발했지만 거제시와 일본 야마가타현의

지원을 받는 행운도 따라, 결과적으로 통산 50억가량으로 덩치가 불어난 상태. 거제시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목적으로 포로수용소 유적관의 일부와

폐교를 영화 세트에 맞게 재건축해줬고, 일본 야마가타현도 시 홍보 차원에서 로케이션에 드는 비용 전액을 대기로 했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며 배창호 감독이 싱글거릴 만하다.

치 밀 한 미 장 센, 비 주 얼 에 승 부 한 다

“<황진이>부터 의도적으로 스타일을 없앴지만 이번엔 임팩트가 강한 비주얼을 만들려고 한다”는 각오대로, 배창호 감독은 젊고 새로운

영상을 위해 무던히 공을 들이고 있다. 촬영감독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김윤수 기사로 젊어졌고,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불의

미장센을 짜본 <리베라 메>의 강승용씨가 맡고 있다. 이 밖에 ‘비주얼 디렉터’라는 낯선 크레디트가 있는데, AFI 출신의 신예

김현성씨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배창호 감독을 도와 색깔과 조명과 앵글 등 미장센의 컨셉을 짜는 것이 그의 일인데 과거는 그린톤으로, 현대는

블루톤으로 가되 시각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기 위해 조명과 색감의 대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감정과 심리가 실린 영상”이 그가

밝힌 <흑수선> 비주얼의 메인 컨셉이다. 이를테면 액션 스펙터클을 4배 고속으로 찍어 슬픈 느낌을 주고, 화재신이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불길을 미리 계산하고 조절하는 식이다. 미장센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또다른 이유는 수퍼 35mm 촬영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을

구현하려 하기 때문.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국내 최초로 시도됐던 이 촬영 기술은 “와이드로 펼쳐 보이기 때문에” 로케이션 촬영이나

군중신 등에서 스펙터클한 맛을 살릴 수 있게 된다.

6월20일경 거제 촬영을 마칠 예정이지만, 남은 분량이 75%로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리산 대신 해남 두륜산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찍고,

서울역 돔 위에 올라가 라스트신을 찍고, 8월쯤 야마가타현에서 한동주와 오 형사의 대결신을 찍어야 한다. 11월 개봉을 맞추려면 빠듯한 일정이다.

쉽지 않은 촬영이지만 배창호 감독은 지금 잔뜩 신이 나 있다. 제작 발표회가 있던 날, 배창호 감독은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술을 권하고 자진해서

노래도 한 가락 뽑아냈다. 모두 ‘앵콜’을 외쳤다. 그건 배창호 감독이 그려낼 ‘대형벽화’가 어떤 모습일지, 그 신명나는 붓놀림에 ‘기대’를

실어보겠다는 뜻이었으리라.

거제도=글 박은영 기자·사진 정진환 기자

▶ <흑수선>

거제도 촬영현장 공개

▶ <흑수선>

배창호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