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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본 ‘악몽의 16분’, <엘리펀트>

20명의 남자가 말없이 20명의 남자를 죽이는 영화, 영국의 기린아 앨런 클라크가 연출하고 대니 보일이 제작한 <엘리펀트>(1989)는 북아일랜드 정치상황에 대한 은유이자 현대사회와 총과 익명의 공포가 주는 불안감을 극도로 표현한 작품이다. 구스 반 산트는 친구 하모니 코린이 최고로 꼽는다기에 본 <엘리펀트>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컬럼바인 고교 총기사건을 다룬 자신의 영화 제목 또한 <엘리펀트>로 정했다. 거기다 그가 새뮤얼 풀러와 스탠리 큐브릭으로부터 ‘충격의 복도’의 이름을 넘겨받은 데에도 앨런 클라크의 몫이 컸으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영예의 일부는 앨런 클라크에게로 돌려져야 한다.

구스 반 산트 방식의 시네마 베리테 혹은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잔혹한 즉흥연주인 <엘리펀트>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은 마이클 무어의 그것과 다르다. <볼링 포 콜럼바인>이 사건의 원인과 해결을 모색하는 것과 달리 <엘리펀트>는 그날 하루(총기를 난사한 아이들 부분에선 이전 며칠이 더 보여진다)를 담담하게 따라갈 뿐이다. 장님이 코끼리의 몸을 만질 때처럼, <엘리펀트>는 사건을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응시한다. 구스 반 산트가 말하듯 그건 어쩌면 궂은 날씨 혹은 광기어린 음악 아니면 비디오게임 탓일 수도 있지만 서툰 해답은 오히려 무관심과 방관을 유발하는 것. 역으로 그는 마지막 남은 몇 시간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왜 그들이 죽어야 하는지, 왜 그것이 가슴 아픈 일인지 보여준다. 간혹 느려지는 영화의 속도와 나지막한 속삭임은 죽음에 다가가기가 무서운 아이들의 멈칫거림과 절규였던 것이다. 악몽처럼 버티고 선 사건 앞에서 우리는 숨이 턱턱 막히고,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막막함에 밤잠을 설치리라. 살인을 저지른 소년이 <엘리제를 위하여>에 이어 포기하지 않고 <월광>과 <열정>까지 연습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까운 길이라면 구해야 했고, 설령 요원하다 해도 같이 뛰었어야 할 일이다.

DVD엔 스탠더드(TV 방영을 위해 제작된 작품이며, 칸영화제 상영시 화면비율도 1.33:1이었다)와 와이드스크린 화면비율 버전이 나란히 수록됐다. 캐릭터의 위치에 따라 반복되는 <엘리펀트>의 신들을 분석하고 싶다면 DVD가 제격인데, 전체적으로 극장만큼은 아니지만 에메랄드빛 하늘과 발소리, 먼 천둥소리, 빗소리가 여전히 마음을 울린다. ‘메이킹 필름’에선 짧으나마 제작현장의 분위기가 엿보인다. 구스 반 산트가 시나리오를 제쳐두고 아이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는 모습이 정겹고, 편집실에서 작업하는 장면도 잠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