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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냉전시대, 스파이 작가가 사는 법
2001-06-27

007을 싫어한 심술쟁이 영감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

● 존 르 카레가 그의 차기작인 <테일러 오브 파나마>의 자료를 수집하러 파나마에

방문했을 때, 파나마 정부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영어권의 가장 잘 나가는 스릴러 작가가 파나마를 무대로 책을 쓴다니 그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뉴스였다. 파나마 정부에서는 국민의 혈세를 펑펑 쏟아부으며 존 르 카레를 국빈 대접했다.

그랬으니 르 카레가 <테일러 오브 파나마>를 출판했을 때, 파나마 고관 대작들이 얼마나 열불이 터졌을지 생각해보라. 그렇게 대접했는데도

불구하고 파나마를 타락한 정치가들이 득실거리는 쓰레기통으로 묘사해? 이런 배은망덕한 사기꾼이 있나.

여기서 우린 사실 하나를 유추해내고 유익한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사실. 파나마 정부 사람들은 그때까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은 적

없다. 교훈. 에릭 앰블러의 뒤를 이은 전통적인 영국 스파이소설 작가에게 정부 선전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특히 냉전시대에 스파이로 일하면서

온갖 끔찍한 일을 다 보고 정부 기관이나 정치가들에 대해 지독한 냉소주의를 쌓아올린 르 카레 같은 남자한테는 말이다.

냉전이 끝난 뒤

스파이물은 스릴러 장르에 새로운 회색무대를 제공했다. 30년대까지 사생아처럼 이리저리 떠돌다가 에릭 앰블러에 의해 세례받고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은 이 세계에서 순수한 선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인공들은 괴물 같은 거대한 정부에 끌려다니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다.007이나

플린트, 나폴레옹 솔로처럼 정부가 제공한 장난감으로 환상적인 모험을 해대는 친구들은 어떠냐고? 그들 역시 이런 회색세계의 산물이었다. 전통적인

액션물에서 주인공의 액션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은 ‘선량한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007식 스파이물의 주인공들은 ‘착한 편’이라기보다는

‘이쪽편’이었고 ‘선량한 주인공’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007 이야기를 정말로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제임스 어쩌고라는 지루한 바람둥이 자연인이

아니다. 진짜 흥미있는 것은 그에게 00번호가 붙은 살인면허가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문명사회의 가장 끔찍한 ‘죄’에도 면죄부가 있는 이 바람둥이를

따라가며 그의 권력 남용을 즐기는 셈이다.

그러나 007 시리즈는 정통적인 스파이물에서는 기형적인 존재였다. 정통적인 스파이물이 제공하는 회색무대는 그보다 덜 분명했다. 정부는 거대한

괴물이었으며 주인공인 개인은 그들이 냉정하게 조작하는 음모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다. 선악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했다고 해도 그건 개인적인 수준에서 제한되었다.

냉전시대는 이 음산한 세계에 더욱 그럴싸한 음영을 넣어주었다. 여전히 국가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려는 괴물들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못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사상을 내세우며 그들의 전쟁을 성전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광신이건 위선이건, 결과는 더욱 극적이었다. 소용돌이는 더 크고

잔인해졌으며 개인은 더 작아졌다. 그리고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에릭 리머스나 조지 스마일리와 같은

르 카레의 주인공들은 이런 천박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존엄성을 유지하려 버티는 작은 개인들이었다. 르 카레는 그 시대를 신나게 이용했다.

그러다 냉전이 끝났다. 이론만 따진다면 스파이 작가들은 잃을 것도 없었다. 첩보전은 여전히 존재하고 세계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톰 클랜시처럼

잠수함과 탱크로 글을 쓰는 작가들은 결코 먹을 게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 르 카레와 같은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그가 그렇게

증오하고 경멸하면서도 끝도 없이 이용했던 세계가 사라졌는데? 새로 탄생한 북적거리는 세계는 그에게 어떤 가능성을 가져다줄 것인가?

파나마, 그곳에 운하가 있으므로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부패한 영국 스파이 앤드루 오스나드가 파나마로 파견되면서 시작한다. 고위관료에 닿아 있는 영국인을 찾던

오스나드는 자칭 영국 정통의 재단사이지만 사실은 전직 보험사기꾼인 소악당인 해롤드 펜델을 찾아내 정보원으로 삼는다. 오스나드의 협박에 못 이겨

스파이 행세를 하던 펜델은 서서히 사기꾼 기질을 드러내며 가짜 정보를 양산해내고 오스나드는 그걸 한몫 잡을 기회로 이용하려 한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어떻게 보면 옛 스파이물 작가들을 안심시킬 만한 작품이다. 무대는 90년대 남미로 바뀌었지만 고전적인 스파이

이야기의 플롯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해롤드 펜델과 타락한 스파이 앤드루 오스나드는 30년대 에릭 앰블러 소설에 나와도 전혀

문제가 안 될 사람이다.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디미트리어스의 관>에 나오는 글로덱과 블릭의 관계와 닮았다. 단지 오스나드에게

글로덱의 직업 윤리가 없고 펜델이 블릭보다 쬐끔 더 양심적이고 복잡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부패한 파나마 정권에 대한 비판일까? 그렇게 좁게 볼 필요는 없다. 영화 초반에 보면

영국 대사관 직원이 오스나드를 위해 노리에가 정권과 부시 정부의 뒤얽힌 관계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몇분짜리 비디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상황설명도 끝이다(다시 말해 관객이 알아야 할 것도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다.). 펜델이 파나마 시내의 마천루들을 가리키며 ‘코카인 빌딩’이라고

떠드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 역시 그리 대단한 정치적 의미는 품고 있지 않다. 후반부에 나오는 야유 섞인 펜타곤 묘사에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둘 필요 역시 없다. 이런 장면들은 파나마가 아닌 어느 곳에도 해당될 수 있고 꼭 미국이 대상일 필요도 없다. 르 카레가 이 영화에서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운하다. 자신만의 음모를 만들고 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도구 말이다. 물론 주변에 적당히 타락한 정부가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고.

어떻게 보면 르 카레가 하는 이야기는 냉전시대와 다를 게 없다. 거대하고 힘있는 정부가 끈을 휘둘러대는 판 위에서 필사적으로 존엄성을 찾아

발버둥치는 작은 개인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양반은 그렇게 극단적으로 냉소적이 되었을까?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러시아 하우스>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르 카레가 이처럼 냉소적인 코미디를 쓴 적은 없었다. 오스나드는 끔찍한 1차원적 캐리커쳐고 정보국은

바보 집단이며 외교관들은 부패해 있으며, 모두 다 굉장한 어릿광대들이다. 세상이 그렇게 바보스러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답이 되지 않는다. 냉전시대라고

세상이 특별히 덜 바보스러웠던 건 절대로 아니다.

나보고 말하라고 한다면 존 르 카레라는 이 양반이 남몰래 냉전시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냉전시대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그의 문학적 원동력이었다. 그에게 근사한 문학적 배경과 실존적 고민을 안겨주었던 그 처절한 시대는 이제

가고 없다. 거대한 허세가 사라졌으니 고민도 작아졌다. 르 카레에게 현대의 스파이전이 그렇게 가소롭게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계의 운명이 좌지우지된다고 믿었던 냉전시대와 지금과 같은 국지전의 시대는 스케일이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고 앰블러 시대로 빠지자니… 그럴

수는 없다. 아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작가들은 과거의 전통으로 그렇게 쉽게 돌아갈 수는 없다. 결국 이 영감은 툴툴거리며 아무에게나

냉소의 화살을 쏘아대는 성질 고약한 영감으로 주저앉았던 것이다.

왜 007 사나이 인가

지금까지 영화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사실 과연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 영화를 존 부어맨의 영화로

보고 글을 길게 늘일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공동 각본가로 참여하고 제작자로 뛰었던 르 카레의 입김이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가

원작과 다르다고 해도 이 작품은 부어맨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르 카레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르 카레의 작품이다. 대표적인 예가 오스나드 역에 피어스

브로스넌을 기용한 부분이다. 물론 존 부어맨이 브로스넌을 기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난 별 어려움 없이 이 모든 게 르 카레의 음모라고

믿는다. 생각해보라. 르 카레는 제임스 본드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본드가 한참 유행이던 60, 70년대 당시, 르 카레는 웬만한 어록집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본드 욕을 많이 했다. “제임스 본드는 창녀다”에서부터 “말도 안 되고 천박하기만 한 현실의 곡해”까지 정말 끝도 없었다.

그 덕택에 그의 주인공 조지 스마일리가 반 제임스 본드용으로 창조되었다는 소문도 떠돌았으니까. 지금도 그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그런 욕들이 한마디씩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그가 제작자인 영화에 진짜 제임스 본드용 배우가 본드의 사악한 캐리커쳐처럼 보이는 사기꾼 악당 스파이로 출연하는

게 과연 우연일까? 심술탱이 영감의 복수로 이처럼 좋은 게 어디 있는가?

이러다보니 이야기는 내가 그린 심술궂은 영감탱이 작가의 초상화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 이 영화가 덜 심술궂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존

부어맨의 공로일 것이다. 비교적 밝아진 결말과 좀더 친절한 익살스러움은 부어맨 덕택일 가능성이 높다. 부어맨의 진짜 공로는 갈수록 야비해지려는

르 카레의 심술보를 억누르고 예술적 브레이크 역할을 한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