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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속 진실을 찾아서
2001-06-28

<미이라> 시리즈의 소재가 된 투탄카문의 뒷이야기

지금도 발매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릴 적 <새소년> <어깨동무> 혹은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유치한 내용이었지만 당시엔 참 흥미진진하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어깨동무>의

자매지로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가 발매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급속도로 어린이 잡지를 외면하고 만화잡지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마

지금의 어린이 잡지 시장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만화잡지가 성공하기 이전부터 어린이 잡지에 싫증이 났던 경험이

있다. 몇년간 꾸준히 구독하면서, 약 2년에 한번씩 특집기사들이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심령의 세계, 세계의

불가사의, UFO의 진실 등의 특집은

기사의 내용조차 바뀌지 않고 고스란히 반복되었을 정도여서 실망을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 그런 주제가 어린 독자를 사로잡기에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버뮤다 삼각지에서 사라진 비행기들의 이야기나, UFO에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증언 혹은 잉카제국의 공중 정원에 대한 미스터리들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또

하나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집트의 파라오 투탄카문을 둘러싼 저주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은 투탄카문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이후 몇년 안에 하나둘씩 죽음을 당했다는 것. 물론 별다른 사실적 근거가 없는 소문임이 확실했지만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파라오의

무덤을 파헤친 자들에 대해 저주가 내려졌다는 이야기는 한동안 전세계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여하튼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투탄카문은

이집트의 대표적인 파라오로 기억되고 있고, 영화 <미이라> 시리즈 역시 그런 소문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투탄카문 미라의 발굴을 둘러쌓고 벌어진 흥미로운 진짜 이야기들은 오히려 저주 운운하는 소문들에 가려져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표기하는 방식에 따라 ‘투탕카멘’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 투탄카문은 기원전 1336년에 태어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왕이다. 투탄카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선왕의 죽음으로 8살에 왕위에 오른 이후, 아문 신의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을 투탄카문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 쇠퇴 일로를 걷고 있던 이집트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즉위 9년 만인 17살에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별다른 역사적 의의를 갖지 못한 그가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된 것은 1922년 그의 무덤이 발굴되면서부터였다. 이전에 발굴된 파라오의

묘들이 대부분 도굴과 전쟁으로 파괴된 상태였던 것에 비해, 투탄카문의 무덤은 원형이 거의 보존된 상태였던 것. 따라서 그 안에서 나온 화려한

부장품과 미라를 넣어둔 관 그리고 다양한 벽화 등은 전세계적인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순금 110kg으로 만들어진 관과 그속에 담겨져 있던 그의 미라는 당시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또한

최초로 향이 발견된 것도 투탄카문의 무덤에서였다. 석고로 만들어진 항아리에 채워져 있던 그 향들은 발견 당시까지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어

발굴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향들은 죽은 파라오의 영혼을 지킴과 동시에 미라의 부패방지와 보존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에서 꺼낸 투탄카문의 미라는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더욱이 부검결과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받고 죽은 것으로 밝혀져,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죽음의 원인을 암살로 추정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사실은 훗날 사람들에게 투탄카문의 저주를 확신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암살당한 파라오의 무덤을 파헤친 자들에게 저주가 내렸다’라는 이야기가 더 극적인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탄카문의 무덤이 발견되고 그 유물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는 발굴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영국의 카나본경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그는 세계여행을 떠났다가

독일에서 자동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때 생긴 상처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길을 포기한 그에게 의사는 추운 런던을 피해 이집트에서의

요양을 권유했던 것. 그 이후 이집트의 고대문명에 매료된 그는 자신의 생을 발굴작업에 쏟게 된다. 한편 발굴현장을 지휘한 하워드 카터 역시

우연한 기회로 이집트문명의 발굴에 참여하게 된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18세의 카터에게 카이로박물관에서 일하던 이집트

학자 뉴베리가 이집트의 문자를 모사하도록 시켰던 것. 그 결과에 만족한 뉴베리는 카터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고, 그때부터 카터는 이집트의 여러

발굴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비전문가의 몸으로 이집트 유물발굴에 뛰어든 두 사람은 1907년 서로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 1922년 투탄카문의 무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투탄카문의 무덤이 비교적 훼손이 덜 된 상태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것도 우연하게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미 900여개나 되는 파라오의 무덤이 발굴되었던 때라 ‘왕의 계곡’이라고 불리던 그 지역은 1912년부터 이미 더이상 발굴될

것이 없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계속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던 람세스 4세, 람세스 6세 등의 무덤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현장에서

나온 흙들을 바로 근처의 공터에 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모래와 바위와 흙이 약 2만t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났는데, 바로 그 흙더미가

1922년 발굴될 때까지 10년간 투탄카문의 무덤을 들끓던 도굴꾼들로부터 철저히 지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연의 연속으로 인해 극적으로

세상의 빛을 본 투탄카문이었기에, 신비함과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저주’ 운운하는 소문을 만들어냈고 그 것이 이어져 지금까지도 할리우드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 <미이라2> 공식 홈페이지 http://www.themummy.com/

▶ <내셔널 지오그래픽> 투탄카문 특집 페이지 http://www.nationalgeographic.com/egypt/

▶ 하워드 카터와 미라의 전설 http://unmuseum.mus.pa.us/mummy.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