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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애환을 남기고
2001-07-04

지난 6월27일 타계한 배우 잭 레먼

지난 6월27일 잭 레먼이 LA 남캘리포니아대(USC) 노리스 암센터에서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살. 66년 <포츈

쿠키>에서 공연한 뒤 평생을 함께한 죽마고우 월터 매튜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지 1년 만의 일이다. 우락부락한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 잭 레먼은 노년의 영업사원으로 나왔다. 새로운 마케팅 기법으로, 체력으로 앞서 달려가는 건장하고 젊은 영업사원들 틈에서

잭 레먼은 움찔거린다. 당장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가정도 풍비박산이 날 위기에 처한 그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그가 살아날 길이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끔찍한 상황에 처한 노인을 선명한 슬픔으로 그려냈던 잭 레먼의 노년은 그러나,

행복한 편이었다. 아니 영화인생 전체가. 코미디 연기자로 출발하여 연기파로 인정받았고, 아카데미 주연과 조연상도 받았다.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에미상 등 받은 상만도 10여개가 훨씬 넘는다. 노년에도 여전히 연기생활을 지속하며 원로로 대접을 받았다. 다만 자신은 스스로를 그리 낙관적으로

평하지 않았다.

“나의 삶은 실수의 연속”이라고 자평한 잭 레먼의 삶은, 1925년 2월8일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됐다. 베이커리 체인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잭 레먼은 하버드대학에 들어가고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는 별다른 굴곡이 없었다. 음악을 하고 싶었고, 연기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 정도가 특이사항. 2차대전이 끝나고 제대한 잭 레먼은 아버지에게 ‘연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해심 많은 아버지는 선뜻 수락했고,

잭 레먼은 300달러를 가지고 뉴욕으로 향했다. 맥줏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연극무대와 TV드라마에 출연하던 잭 레먼은 54년 영화계에 데뷔한다.

우리가 잭 레먼을 기억하는 것은 주로, 코믹 연기다. 처음 스타덤에 오른 것도 독특한 코믹연기를 선보인 <미스터 로버츠>(1955)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59년에는 마릴린 먼로, 토니 커티스와 공연한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빌리 와일더 감독을

만난다. 도시인의 웃음과 애환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빌리 와일더 감독은, 잭 레먼에게서 ‘코믹 연기’ 이상을 끄집어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출세를 위해 직장 상사의 밀회장소로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는 회사원의 이야기. 그러다가 그만, 상사의 정부를 사랑하게

되는데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면서도 어느 순간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영화다. 잭 레먼의 웃음 사이에는, 도시인의 얇고 투명한 상처가

찰나마다 내비치고 있었다.

62년에 출연한 <술과 장미의 나날>은 잭 레먼이 단순한 코믹 연기자가 아니라, 성격연기에도 탁월한 배우임을 증명했다. 잭 레먼의

연기는 “본성에서 오는 예민한 에너지를 반영”한다는 평을 받았다. 알콜중독자를 연기한 <술과 장미의 나날>로 잭 레먼은 평론가와

관객의 격찬은 물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처음으로 후보에 올랐다. 이후 잭 레먼은 <미싱> <차이나 신드롬> 등 남우주연상

후보로 7번 올랐고, 73년 <세이브 더 타이거>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코미디 연기가 2번, 드라마 연기가 5번이었다. 잭 레먼은

<미싱>(1982) <차이나 신드롬>(1979)으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2번 수상하고, 88년에는 AFI에서, 96년에는

베를린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빌리 와일더가 감독으로서 잭 레먼과 콤비였다면, 배우로는 월터 매튜가 있었다. 고약한 인상의 월터와 하버드 출신의 도회적인 잭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포츈 쿠키>에서 처음 만나 주책스런 노인 콤비를 연기한 <그럼피 올드 맨>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동지가 되었다. 80년대 이후 잭 레먼은 주로 TV에서 활동했지만 <플레이어> <햄릿> 등 영화에도

발길을 끊지 않았다. 마지막 작품은 목소리로만 출연한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의 <베가번스의 전설>이다. 잭 레먼은 50년 배우 신시아

스톤과 결혼하여 아들 크리스를 낳았고, 62년 배우 펠리시아 파와 재혼하여 딸 코트니를 가졌다. 김봉석 기자 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