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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에피소드, 추억은 어디에?
2001-07-05

컴퓨터 게임/ 게임과 죽음

죽음이 뭔지 어렴풋하게나 알게 되는 건 대여섯살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죽음이 추상적 옷을 벗는 건 가까운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졌을 때에 이르러서다. 그제서야 죽음의 무게를 맨살갗으로 느낄 수 있다. 그 무게에는 공포, 상실감, 후회 같은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죽은 것은 타인이지만 절실하게 느끼는 건 내 자신의 유한성이다. 그 유한함은 삶의 시간들, 소중한 사람에게 남길 추억들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게임은 삶을 시뮬레이팅한다. 그 속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냥 하룻밤 꿈처럼 가볍게 날려버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게임 속의 삶은 제법 무게감이 있다. 때로는 그 삶을 더 사랑하고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현실과 게임의 삶이 역전된다.

하지만 게임은 죽음을 시뮬레이팅하지는 못한다. 분 단위, 초 단위로 죽음이 벌어지는 ‘폭력의 온상’답지 않다. 게임 속에는 죽음이 있다. 굉장히 많이 있다. 하지만 게임 속 죽음에는 무게가 없다.

롤플레잉 게임을 위해 열린 네트워크상의 수많은 방들 중 하나에서 모처럼 맘에 맞는 친구를 만난다. 나보다는 한참 레벨이 낮은 초보자를 데리고 위험한 적을 막아주며 경험치를 쌓도록 도와준다. 귀중한 아이템을 양보하고 속깊은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다 드디어 레벨이 비슷해지고 같이 모험을 떠날 참인데 갑자기 등뒤에서 칼이 꽂힌다. 나는 무기력하게 길바닥에 쓰러지고, 그는 내 귀를 잘라내며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레벨 좀 높다고 잘난 척하는 걸 봐주기가 얼마나 지겨웠는지 떠들어댄다. 그리고 값나가는 것들을 전부 챙겨서 유유히 사라진다. PK, 플레이어 킬러다.

죽음을 맞은 건 게임 속 캐릭터다. 하지만 게이머의 육체에 반응이 온다. 순간적으로 숨이 멎고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일시적으로 판단력이 정지된 상태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러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PC를 끄는 것도 잊고 집 밖으로 뛰쳐나와 술을 마신다. 한동안은 PC 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는 이들 모두에게 사발통문을 돌려놓고 복수계획을 짠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게임을 나와 다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에는 분명 죽음이 있다. 개인 차이는 있지만 힘든 경험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리셋’이나 ‘리스타트’의 기회가 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다음 생으로 옮겨갈 수 있다. 자기를 죽인 게이머에 대한 복수의 각오건, 아니면 모든 걸 잊고 새로운 게임을 즐기겠다는 희망과 기대이건 기억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죽는 바로 그 순간에도 게이머는 안다. 죽음은 하나의 ‘중단’일 뿐이다. 곧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서 죽음의 무게는 줄어든다. 죽음은 게임 속에서 만나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줄어드는 죽음의 무게만큼 후회가, 그리고 추억이 들어설 여지가 줄어든다. 준비해야 할 끝이 없는 삶에서 후회란 없다. 쌓아나갈 추억이 없는 만큼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게임은 삶을 시뮬레이팅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시뮬레이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속의 삶은 온전하게 시뮬레이팅된 게 아니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절대적인 후회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현실에서 역시 죽음은 충분한 무게를 가지지 못한다. 다들 언제까지나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처입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리셋이 불가능하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