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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랑의 판타지 같은 서사, <인게이지먼트>
박은영 2005-03-08

<아멜리에> 콤비가 도전한 멜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헤매다.

장 피에르 주네오드리 토투와 재회했다는 소식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 <아멜리에> 속편을 만들려나? 그런데 잘못 짚었다. 이들이 의기투합한 신작 <인게이지먼트>는 약혼자의 전사 통보를 받은 여인이 연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낯선 이미지로 풀어 보이던 주네였기에, 참혹한 전쟁과 애절한 사랑이 교차하는, 너무 익숙해서 닳은 느낌이 나는 이 소재는, 그답지 않은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뜻밖에도 <인게이지먼트>는 주네가 무려 10년 전부터 기획하던 프로젝트로, <아멜리에>의 성공을 발판으로 현실이 되었다. 진부해 보이는 전쟁멜로에서, 주네는 어떤 미덕을 발견한 걸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나 반대로 모두가 보는 대로 보지 않는 눈을 지닌 마틸드의 결심, 거기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그 역시 다른 감독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감독인 만큼, 아주 ‘다른’ 멜로를 기대해도 좋을 듯싶었다.

1차대전 중에 자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다섯 병사 중에 마틸드(오드리 토투)의 연인, 마네크(가스파 울리에)도 있었다. 그는 적의 사격을 유도해, 손에 총상을 입었다. 운이 좋다면 살아서, 운이 나쁘면 죽어서라도, 그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벗어나, 고향에 있는 연인의 곁에 가닿을 수 있길 바랐던 것이다. “처음 같이 잘 때 그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잤다. 상처의 고통은 그녀의 심장소리 같았다. 그의 손에 그녀의 심장이 있다. 그가 죽으면 그녀도 느낄 것이다.” 그녀는, 그런 그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의 행적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함께 참호에 버려졌던 병사들의 친지들을 만나면서, 마틸드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혼란에 휩싸인다. 사과껍질이 끊어지지 않으면, 일곱을 세기 전에 검표원이 들어오면, 내가 먼저 모퉁이에 다다르면, 그가 살아 있다고 믿기로 하는 게임의 결과도 마찬가지로 오락가락한다.

마틸드의 여정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참호 속의 다섯 죄수 중에서 독일 군화를 신은 죄수와 그의 또 다른 동료가 살아남았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생존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관련 인물들의 가족과 친구와 연인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아마비인 마틸드의 다리가 되어주는 ‘자칭’ 명탐정의 부산한 활약에도, 사건의 가닥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미스터리 구조의 멜로 <인게이지먼트>는 여러 주변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한 사람의 정체와 행방을 찾아가는 구성으로는 <시민 케인>을 닮아 있고, 그들의 증언에 따라 버전을 달리하며 반복 재연되는 상황들은 <라쇼몽>을 닮아 있지만, 전쟁과 사랑의 서사를 ‘리얼리티’보다 ‘판타지’에 가깝게 그려낸 정밀한 손끝은 영락없는 장 피에르 주네의 것이다.

우선 여주인공 캐릭터. 금방이라도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던 <아멜리에>의 그녀는 “울 수 없으면 말이라도 하라”는 충고를 들을 정도로, 감정을 삭이고 누르는 여인이 되었다. “이건 집착이야.” “아뇨, 희망이죠.” 세상 모두가 ‘아니’라며 말릴 때, 홀로 ‘그렇다’며 뛰쳐나가는 단호함도 보인다. 앉아 있던 휠체어를 접어들며 “기적은 의외로 흔하다”고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약혼자의 생사를 두고 ‘그렇다, 아니다’ 게임에 몰두하거나, 외간 남자와의 에로틱한 연애를 상상하는 엉뚱함에는 아멜리에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희망을 놓지 않는 마틸드와 달리 연인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복수를 감행하는 음산한 매력의 창녀 티나는 주네가 마르크 카로와 함께 만든 초기작에서 빠져나온 듯한 캐릭터다. 마틸드의 여정에 쉴새없이 끼어드는 인물들의 사연은, 마틸드의 의식과 감각으로 재구성되는데, 이 화법이 또 영락없는 주네표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면, 몇 가지 특징적인 에피소드가 수다스러운 내레이션과 함께 속성으로 소개되는데, 더러 뉴스릴과 무성영화와 카툰을 차용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 흥미롭고 감동적이기도 한 <인게이지먼트>의 문제는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데 있다. 전쟁과 사랑, 서사와 서정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차가운 청회색을 닮은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마네크의 전쟁터, 바랜 사진첩처럼 아련한 갈색의 온기와 애조를 띤 마틸드의 일상은, 서로 다른 두편의 영화가 엇물린 듯 어색하게 느껴진다. 한편에는 눈앞에서 폭격으로 터져버린 동료의 살점을 물벼락 맞듯 뒤집어쓰는 마네크의 처참한 모습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술래잡기’에서 ‘탐정놀이’로 종목을 바꾼 아멜리에(즉 마틸드)가 노을 지는 해변에서 튜바를 부는 동화책 삽화 같은 풍경이 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등의 초기작에서 ‘단조’로 일관했던 주네는 <아멜리에>에서 ‘장조’로 음계를 바꾸었고, <인게이지먼트>에 이르러 장조와 단조를 뒤섞는 과감함을 보였으며 이로써 불협화음을 내는 무리수를 두었다.

장 피에르 주네는 마르크 카로와 결별한 뒤로 카로가 혐오했다던 ‘향수’와 ‘복고’와 ‘감상’으로 보란 듯이 돌진하고 있다. <아멜리에>가 선언이었다면, <인게이지먼트>는 본격적인 실험과도 같다. “주네의 비주얼과 토투의 연기가 어우러진 감정 발전소”(피터 트래버스)라는 극찬부터 “토투의 눈물까지 특수효과 같다”(마놀라 다지스)는 비판까지, <인게이지먼트>가 보여준 이미지의 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미지로 말을 거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까지 흔들어보려 했던 주네의 시도는 절반만 성공했다.

프로덕션 스토리

광기와 판타지의 시대를 되살리다

장 피에르 주네는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완성한 직후인 1991년, 세바스티엔 자프리소의 전쟁 로맨스 소설을 읽고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바로 제작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만만치 않은 영화 규모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활자를 영상으로 옮겨낼 기술력이 미덥지 않았기 때문. <아멜리에>가 프랑스 안팎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주네는 할리우드(워너브러더스)의 부분 투자 약속을 얻어내고, 프랑스영화로는 대단히 큰 규모인 5500만달러의 예산을 확보해, 마음에 둔 지 10년 만에 <인게이지먼트>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주네는 영화의 배경인 1차대전 무렵 프랑스에 “암울한 사건이 많았지만, 순수의 판타지로 기억되는 시대”라서 특별한 관심을 두었고, 이를 재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 시대의 뉴스와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비주얼에 영감을 준 것은 브라질 화가 후아레즈 마차도의 그림과 <대부>의 미장센. <아멜리에>의 촬영감독 브루노 델보델과 합의한 기본 컨셉은 전선과 후방의 풍경을 대비해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20만제곱미터의 군 기지에 참호와 터널을 파고, 폐허가 된 비무장 지대도 재현했는데, 전투장면은 미화하지 말자는 원칙을 세우고, 모노톤의 배경에 총포가 터질 때 나는 섬광을 강조해 전쟁의 광기와 공포를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 파리, 브르타뉴, 포에티에 등지에서 6개월간 로케 촬영했고, 꼭 그만큼의 시간을 후반작업에 투자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프로덕션디자이너 알린 보네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의상 담당 마들린 폰테인이 함께했다.

여전히 주네의 영화답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익숙한 배우들에 있다. <아멜리에>로 만인의 연인이 된 오드리 토투는 물론이고 주네의 데뷔작부터 출연해온 배우들이 눈에 띈다. 주네가 “나의 영화 세계에 딱 어울리는 배우”라고 소개한 도미니크 피뇽은 마틸드를 친딸처럼 보살피는 삼촌으로 출연해, 이제까지 주네 영화의 캐릭터(떠돌이 톱 연주자, 실패한 실험의 부산물 클론, 스토커) 중 가장 멀쩡한 인물을 연기한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푸줏간 주인 장 클로드 드레이퍼스는 죄수들의 사면 승인을 묵살하는 무책임한 군 관리로 출연해, 주네 영화의 악역 계보를 홀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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