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DVD 시장에 평소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마니아들을 위해 출시한 타이틀들이 시장에서 외면 받는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인기 있는 일본 작품조차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왜 대중적이지 않은(?) 국산 애니메이션의 출시를 요구하는가?'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 대해 '만화인'의 운영자 서찬휘 씨의 생각은 달랐다. <레스톨 특수구조대>는 단순히 국산 애니메이션이어서가 아니라 DVD로 나와야할 당위성을 가진 훌륭한 작품이라는 입장이다.
본인 스스로가 열렬한 팬으로서 해당 작품에 대한 애정을 숨기고 있지 않지만 서찬휘 씨는 뚜렷한 주관과 확신, 그리고 팬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진정한 마니아였다. 단순히 서명운동이라는 판만 벌여놓은 것이 아니라 DVD 발매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본인과 '만화인'이라는 사이트에 대해 소개해 달라
'만화인'은 올해로 개설 7년을 맞이하는 인터넷 만화 / 만화영화 누리집(사이트)이다. 만화나 만화영화를 직접 제공하지 않는 대신 그러한 매체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자칫 지나치기 쉬운 여러 '정보'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평론이나 분석보다도 작품들을 즐기는 데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게끔 배려하고 있다.
현학적인 시선보다는 보고 웃고 울 수 있는 순수한 감상자를 환영하며, 그와 함께 정보를 생산, 축적하고 재생산해낼 수 있는 이들이 모이는 장소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부조리한 판의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의 장을 여는 등 '행동하는 만화인'들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도 하다.
지기를 맡고 있는 본인은 여러 매체를 통해 만화 / 만화영화 컬럼니스트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독자만화대상', '만화인의 노래' 등 갖가지 행사에서 프로그래밍과 디자인을 맡고 있다.
서명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만화인'에 지난 1월 경 만화와 만화영화에 관련한 서명운동을 벌일 수 있는 전용 공간을 열었다. 특히 이쪽 분야에서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도 좀처럼 목소리를 모으기가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던지라, 그런 걸 간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 한 것이다. 처음 시험 가동 할 때, 회원 중 한 분이 지나가듯 쓴 주제가 <레스톨 특수구조대> DVD 발매였다. 아이디 Albireo라는 분인데, Neoadam이라는 분과 함께 <레스톨 특수구조대>의 팬페이지를 방영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운영하시면서 팬들의 구심점 및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분이다. 본인 또한 녹화 비디오를 하염없이 돌려가면서 대본까지 옮겨 적었을 만큼 그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알게 된 분들이다.
이전에도 우리는 이후 이벤트 CD 제작 등 <레스톨 특수구조대>에 관련한 활동은 물론, <바다의 전설 장보고> OST 공동구매를 비롯해, 왜곡된 방영시간대로 인한 국내 창작 만화영화계의 피해가 매우 큰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서명운동 '잃어버린 시간'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해왔다. <레스톨 특수구조대>의 DVD 발매를 위한 서명운동 또한 그러한 현실 인식과 팬으로서의 마음이 함께 작용한 결과물인 셈이다.
<레스톨 특수구조대>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다.
한동안 맥이 끊겨 있던 국내 TV 만화영화 제작의 불씨를 살린 <영혼기병 라젠카>의 제작에 참여했던 '서울무비'가 직접 기획 및 제작에 나선 26부작 TV 만화영화다. 1999년 1월 29일부터 매주 금요일에 KBS에서 방영되었으며 케이블 채널인 투니버스와 아리랑TV에서도 수차례 재방송을 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새벽시간대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아리랑TV에선 영어로 재더빙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구조 로봇물'이다. 로봇하면 의례히 선악구도상에서의 영웅이나 전쟁 병기로 등장하는 게 보통인데 반해, '재앙'을 당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로봇이라는 설정은 지금 봐도 멋진 것 같다. 여기에 다섯 명의 개성적인 캐릭터들과 그 성격에 맞춰 역할 분담이 된 독특한 기능의 로봇들이 만들어내는 조화, 그리고 '희망의 이름'으로 귀결되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이들 뿐 아니라 청소년, 어른들이 봐도 무리가 없을 만한 작품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작품이 국내 인력과 기획력으로 제작된 순수 창작물이라는 점이다. 근래 한일합작이라는 이름 하에 돈만 대고 실제 기획은 거의 일본에서 진행하는 '무늬만 국산'인 작품이 많지만, <레스톨 특수구조대>는 다소 미숙한 점은 있을지언정 그 전 제작 공정을 국내에서 직접 해결했기 때문에 그 노력을 높이 사줄만 하다. 이후 '서울무비'는 <바다의 전설 장보고> <보리와 짜구> <탱구와 울라숑> <요랑아 요랑아> 등, 우리나라 TV 만화영화계에 길이 남을 굵직굵직한 순수 창작물들을 내놓게 되는데, 그것들이 가능했던 기반이 되어줬던 것이 바로 <레스톨 특수구조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즘과 같이 '무늬만 한국 작품'이 늘어나는 시점에서 <레스톨 특수구조대>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일본 위성 방송인 NHK BS2에서 <장갑구조부대 레스톨>이란 제목으로 일본어 더빙판이 방영되어 제법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일본에서도 우리말 주제곡이 그대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만든 <레스톨 특수구조대> 팬 사이트들을 역시 재미있게 꾸며져 있다. 정작 우리나라에선 일본에서 방영되고 나서야 관심을 보이게 된 사람이 일본어 더빙본으로 들으면서 우리말 더빙 수준이 떨어진다느니 하는 등의 허튼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보면 슬픈 현실이다.
다른 국산 만화영화들보다 <레스톨 특수구조대>를 원하는 이유가 있는지?
우선은 우리가 <레스톨 특수구조대>의 팬이기 때문이다(웃음).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애착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특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레스톨 특수구조대>는 신기하게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팬들이 늘어나는 케이스다. 일본 만화영화를 동영상으로나 돌려보면서 무조건 일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해가 안가겠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감동을 선사해준 작품이었다. 다른 국산 만화영화는 DVD나 하다못해 대여용 비디오로라도 나왔는데 반해 <레스톨 특수구조대>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완전히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뒤늦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은 현재로선 케이블 TV에서 간간히 새벽 시간대에 틀어주는 재방송을 챙겨봐야 하는 고충이 있다. 작품 종영된 지 6년이나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팬의 입장에선 안타깝다 못해 괴로울 수밖에 없다. 본인의 경우는 녹화해둔 테이프를 너무 많이 돌려본 탓에 이젠 재생이 불가능한 지경이라서 더더욱 간절한 입장이다.
아무쪼록 이 작품의 DVD화가 이뤄져서 다시금 재평가 받았으면 하고, 점차 다른 국산 만화영화들도 DVD로 발매되기를 희망한다. 물론 현재 시장 상황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기에 서명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현실'을 이야기하며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우리가 해왔던 여러 활동들이 늘 현실과 맞부딪치는 부분들에 대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서명 기간은 언제까지이며 서명자 수가 어느 정도가 되기를 기대하나?
딱히 기한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급적 많은 분들이 빠른 시간 내에 참여해주셨으면 한다. 마음 같아서는 1,000명 이상 서명해주기를 바라지만, 선주문 판매를 목표로 최소 300에서 500명을 기대하고 있다.
서명운동 이후의 계획은 있는가?
우리는 <레스톨 특수구조대>의 방영 당시부터 꾸준히 이 작품에 관련한 활동을 펼친 탓에 서울무비 PD분들과 어느 정도 연이 닿아 있다. 그분들에게 서명운동의 성과를 알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겠지만 말이다. 성과가 있으면 DVD 전문 제작사에 우리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생각이다.
사실 시장성을 고려한다면 발매 요구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만화인'을 통해 선주문을 받아 일정 수량 이상을 수요를 확보해 추진한다면 소량이라 해도 어느 정도 비용을 맞추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간 유통 과정 없이 직접 전달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행히 이번에 예약과 통신판매를 위한 집계 시스템도 개발해 어느 정도 준비는 갖춰 놓은 상태다.
예전에 팬들의 서명운동만 믿고 일본 게임을 발매했다가 제작사가 낭패를 본 경우가 있었다. 같은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까?
그런 이야기도 듣기는 했지만 만화 출판 쪽에서는 과거 <출동! 먹통 엑스>라는 만화가 서명운동을 통해 복간되어 좋은 성과를 거둔 적이 있다. 이번에 우리는 서명자가 일정 수준에 달하면 구매 신청자로부터 선입금을 받아 리스크를 줄인 뒤 제작사와 접촉할 방침이다.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 DVD 시장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암울하다는 생각이다. 제 때 제 값 내고 사면 바보 되는 게 사실이니까. 싼 걸 찾는 게 소비자 심리인 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애초에 작품을 돈 주고 사 본다는 개념이 없는 이들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게임 잡지의 번들 CD로 떨려 나오던 게임들을 보며 정품 패키지를 산 사람으로서 괴로워하던 기분을 똑같이 느끼고 있다.
비단 DVD 뿐 아니라 출판 만화나 음반 시장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초고속 인터넷이 일상화한 국내 사정이 낳은 병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 못 사고 못 본다'는 것과 '돈이 없으니 훔쳐서라도 보는 것이 애정이다'라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과거처럼 아예 정식 수입 경로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복제품 비디오를 샀을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는데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불법복제나 다운로드는 정당화 될 수 없는 범죄다. 물론 덤핑 등에 관련한 업체 측의 안일한 자세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아예 나오면 바로 사지 않고 기다렸다 덤핑 풀리면 그제서야 사는 이들도 많은데, 그들을 비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만화책처럼 대여시장에 공급한다는 계획도 시장 확대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뻔한 이야기지만, 지갑을 덜 여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팬들이나 안 사는 이들을 탓하면서 출혈경쟁을 벌이는 업체들이나 서로 반성하고 함께 문제를 인식해 해결 방안을 내는 수밖에 없다.
경제가 어려우니 지갑 열기 어려운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서 못 사는 것과 살 생각도 없지만 보긴 해야겠다는 건 엄연히 다르다. 그러한 인식이 없이는 문화 매체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문화계가 쓸데없이 시끄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끔 해놓고선 질을 논하기 때문이다.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좋아하는 작품 하나 사서 보는 게 그 무엇보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업체 쪽에서도 앞이 안 보이는 싸움이겠지만 '팔기 위한' 노력을 좀 더 들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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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서울무비의 입장
서명운동의 주체는 팬들이지만 아무래도 결정권을 쥐고 있는 곳은 제작사인 서울무비다. <레스톨 특수구조대> DVD 발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울무비 마케팅 부서 근무 이강민 팀장에게 물어봤다. 그는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평소 팬들의 열성적인 활동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DVD 발매에 관해서는 자사의 컨텐츠를 DVD로 제작해줄 전문 제작사들을 필요로 하는데, 어려운 시장 여건 상 선뜻 나서주는 곳이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다못해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인 <탱구와 울라숑> 같은 타이틀이 대여시장을 통해서라도 발매되기를 희망하지만 아직은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이번 서명운동이 성과가 있다면 <레스톨 특수구조대> DVD 발매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