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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으로 포장하지 않은 현실적인 가족영화 <밀리언즈>
김수경 2005-05-03

하늘에서 떨어진 100만파운드를 두고 두 아이가 벌이는 경제학과 윤리학의 충돌.

어린 시절 용돈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들을 타이르는 어머니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있다.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줄 아니?” 영화 <밀리언즈>에서는 그렇다. 아버지의 재테크를 위해 신흥 주택단지로 이사한 데미안과 안소니 커닝햄 형제. 데미안은 먼저 이사 직후 빈 박스로 자신만의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짓는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나이키 가방이 종이로 지은 데미안의 안식처를 덮친다. 지퍼를 열면 100만파운드의 돈다발. 데미안은 하느님이 내리신 돈벼락을 두살 터울 형인 안소니에게 즉시 보고한다. 끙끙거리며 집으로 가방을 끌고 오던 안소니는 어른스럽게 세금문제를 거론하며 데미안에게 비밀로 하자고 설득한다. 졸지에 거액을 거머쥔 두 형제의 삶은 럭비공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갑자기 생긴 거액’은 장르영화에서는 들꽃처럼 흔한 소재, 하나 해마다 재활용이 가능한 매력적인 원재료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두 아이, 시간적 배경은 유로화 통합까지 열흘이라는 독특한 레시피를 통해 <밀리언즈>는 이야기를 날씬하게 다듬어간다. 기존의 로또 혹은 대박형 영화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밀리언즈>가 전면에 배치한 카드는 데미안이라는 일곱살 먹은 독특한 주인공이다. 성자들의 연대기와 특성을 줄줄 외우며, 돈의 무용성을 설파하는 애늙은이 데미안은 돈벼락 이후 자신을 위한 일체의 사행성 소비를 배제하고 자선사업과 부의 재분배에 주력한다. 환상에서 자신이 만나던 성자와 성녀들이 행했던 것처럼. 상반된 두 형제의 소비 패턴을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전반부는 충분하다. “돈은 초콜릿처럼 사라지는 물질일 뿐”이라는 데미안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가난한가요?”라고 물으며 돈을 건네주느라 정신이 없다. 모르몬교도건 노숙자건 데미안의 자선사업은 인종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펼쳐진다. 세법과 부동산 투자를 돌림노래처럼 부르는 안소니는 즉각 주위의 친구들을 기사와 보디가드로 고용하고, 여학생들에게 환심을 사며 학교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 안소니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데미안의 선행은 돈가방을 탈취했던 도둑이 돈의 행방을 찾아내는 실마리로 남겨진다.

가족영화 <밀리언즈>는 현실적이다. 예의 강조되는 가족의 따뜻함과 어린이의 순수함을 강박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안소니와 데미안은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남의 집에서 쿠키를 얻거나 가게에서 돈을 내지 않으려면 어머니의 죽음을 내세우고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 효과만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는 그들이 본능적으로 배운 돈으로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첫 번째 원칙이다. 한없이 너그럽고 성실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아버지 로니가 도둑으로 인해 난장판이 된 집을 목격하고는 처음으로 화를 내며 돈을 돌려주지 않을 것을 결심하는 모습은 <밀리언즈>가 가진 균형감각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커닝햄 3부자 사이에 끼어든 도로시를 의심하고 데미안에게 비난을 퍼붓는 안소니의 강박적인 모습도 세사의 어려움과 욕망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매질에 장사 없다’는 옛말은 근대를 지나 ‘돈 앞에 군자 없다’로 변경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는 데미안도 옳지만, 아버지에게 큰 지프를 사주고 싶다는 안소니의 효심을 비난할 권리는 세상 누구에게도 없다. 영국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청명한 푸른 하늘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매력적인 동화의 세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돈을 둘러싼 욕심과 의심으로 얼룩진다. 뿌린 자가 거두는 법. 가방을 처음 발견한 꼬마 자선사업가 데미안이 해결에 나선다.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의 아동판 <밀리언즈>를 내놓은 대니 보일의 연출력은 녹슬지 않았다. 특유의 판타지를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의 안과 밖을 드나드는 성자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데미안의 감정과 심리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잡히는 앵글이나 예민한 음악을 통해 시공간의 변화를 포착하는 화면구성도 여전하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면서 그들을 독립된 주체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터. 다만 이야기 구조에서 처음 돈가방을 훔쳐낸 도둑의 이야기가 용두사미격으로 처리되는 점과 단편적으로 나열되는 주변 인물은 관객의 공감을 가로막는다.

<밀리언즈>는 강탈극과 코미디라는 외투를 입은 성장영화다. 데미안과 안소니는 돈벼락이라는 행복해 보이는 퀴즈를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풀어나간다. 정답은 없다. 돈만 있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던 초반의 자신감과는 달리 만만치 않은 난관이 그들을 기다린다. 사람들의 눈을 언제나 의식해야 하고, 언제나 소곤거리며 몰래 이야기해야 한다. 종국에는 그 무거운 돈가방을 짊어지고 크리스마스 연극에 출연해야 하는 중노동이 그들을 괴롭힌다.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 두 아이는 남을 돕고, 이용하고, 의심하고, 설득한다. 거대한 경제공동체를 위해 ‘파운드화가 세상에서 사라질 그날’이 다가올수록 두 아이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간다. 둘은 “1유로는 67펜스”라는 물리적인 수치보다는 돈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고 빼앗아가는지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영사기가 돌아가면 ‘밀리언즈’라는 어느 영화보다도 작은 타이틀이 슬쩍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언젠가 길에서 주웠다가, 주머니 속을 살펴보니 어느새 자취를 감춘 그 임자없는 동전처럼.

<밀리언즈>의 두 아역배우

준비된 연기자들- 귀엽게 혹은 구슬프게

<밀리언즈>의 원투펀치는 단연 두 아역배우다. 프란치스코 성자처럼 행동하는 데미안과 글로벌 기업의 총수처럼 움직이는 안소니의 콤비플레이는 <밀리언즈>를 아동판 버디무비로 만들었다. 오디션으로 발탁되어 1년을 같이 지낸 데미안과 안소니는 <키즈 리턴>에 등장했던 만담 콤비를 연상시킨다. 두 사람이 주로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은 주위의 어른들이라고. 천사 같은 데미안을 연기하는 알렉스 에텔은 “데미안은 나와 전혀 다른 캐릭터다. 사실 난 안소니쪽이 좋았는데”라고 말하자, 이에 대해 자본주의의 화신 안소니 역을 맡았던 루이스 맥거본은 “안소니는 사실 누구라도 친하고 싶지 않은 인간형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이니까. 하지만 실제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응수했다.

700 대 1의 경쟁률이던 오디션에서 그들을 발탁한 대니 보일 감독은 “루이스는 성인 연기자에 가까운 준비가 된 상태라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밀리언즈>가 첫 출연인 알렉스와 달리 루이스는 <머지 비트>라는 TV시리즈를 경험한 연기선배다. 알렉스와 루이스는 올해로 극중보다 4살 위인 11살, 14살이 되었다. 대니 보일은 “초기 촬영 이후에는 자신의 연기지도보다는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중점을 두었다. 관객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대목은 전부 두 사람의 몫”이라고 그들의 재능을 칭찬했다. 촬영 중 동시녹음 기사의 이름을 불러댈 정도로 장난꾸러기인 두 아역배우와 감독이 친해진 묘책은 축구였다. 영화 속 내용과는 달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광적인 팬인 알렉스와 루이스는 촬영 기간 동안 감독과 자주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후일 알렉스는 “축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대니를 절대 자기 팀에 넣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실제로 알렉스는 맨체스터 출신이다. 루이스는 워링턴이 고향. 촬영 중 우는 장면에서 누가 먼저 울었는지에 대해 입씨름을 벌이고, 아직은 누이와 형들의 칭찬에 가장 기뻐하는 알렉스와 루이스가 어떤 배우로 성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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