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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계의 전설, 카렐 제만의 미학세계
김도훈 2005-05-04

특수효과까지 아우른 마술같은 상상력

<죽음의 발명품>

카렐 제만(1910~1989)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다. 그가 만들어낸 영상은 화면에서 끄집어내어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만큼 아름답고, 카툰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인형 애니메이션, 매트 페인팅 기법에 라이브 액션까지 혼재된 기법들이 완벽하게 직조된 미장센 속에 녹아있다. ‘체코 학파’라 불릴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체코 애니메이션계에서도 카렐 제만이라는 이름이 ‘대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관객의 정서적 반응에만 기대이지 않는다. 기술적, 미학적으로도 카렐 제만의 작품들은 불멸의 가치를 품고있다.

1910년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난 카렐 제만은 프라하와 파리에서 산업미술을 공부한 뒤 포스터 아티스트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뛰어든 것은 40년대 중반. 그의 얼터에고인 말(馬) 캐릭터 ‘프로콕’을 만들어 내면서부터 카렐 제만의 재능은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는 곧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작업과 아트디렉터 일을 시작했고, 50년대초에는 자신의 작품들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기 시작했다.

그의 첫번째 작품은 <크리스마스의 꿈>(45)으로, 소녀에게 버려진 낡은 인형이 살아서 춤을 추다가 다시 소녀의 애정을 되찾는다는 내용. 라이브 액션과 인형 애니메이션을 섞은 이 작품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다. 본격적으로 카렐 제만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은 <영감>(48). 체코의 특산물중 하나였던 유리를 절묘하게 이용한 이 작품은,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상태의 유리를 입으로 불어서 형태를 갖추고, 한장면씩 끈기있게 찍어내는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경이적일 정도의 미적 성취도를 자랑하는 <영감>은 유리라는 질매가 산호초, 물고기, 발레리나 등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유롭게 형태를 변경할 수 있는 유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카렐 제만의 면모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면의 밤>에도 초대된 3편의 장편에서일 것이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61)은 유명한 16세기의 실존인물 뭉크하우젠 남작의 이야기를 담은 G.A 뷔르그의 원작을 토대로 한 작품. 달세계에 불시착한 한 남자가 엉뚱하게도 허풍선이 남작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페가수스가 이끄는 배, 물고기 뱃속에 갇힌 일행과 바닷속 여행처럼 온갖 마술적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무성영화 시대의 위대한 마술꾼 조르쥬 멜리어스에 대한 오마주이며, 테리 길리엄 감독의 <바론의 대모험>(88)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세기말의 SF 작가인 쥘 베르느의 원작을 토대로 한 <죽음의 발명품>(58)은 기이할 정도로 세월을 타지 않은 작품이다. 전쟁에 악용될 발명품을 개발한 교수가 자신을 납치한 범죄자에게 대항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미술과 세트가 마치 MTV에서 만든 뮤직비디오처럼 보일정도로 현대적인 세련미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컷 아웃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의 유려한 결합을 자랑하는 <죽음의 발명품>에서의 실험은 64년작 <익살꾼 이야기>로 이어진다. <익살꾼 이야기>는 카렐 제만의 기술적인 장인정신과 미학적 성취도가 절정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7세기 독일의 종교전쟁을 무대로 한 이 한편의 모험담은 라이브 액션, 포토 몽타주, 컷 아웃 애니메이션과 매트 페인팅에 특수효과가 유려하게 직조되어 있고, 오랜동안 독일의 억압적인 통치아래 허덕이던 체코인들의 정치적 반골정신 또한 유쾌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장편들에서, 카렐 제만은 카툰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인형 애니메이션과 매트 페인팅 기법에다 라이브 액션을 뒤섞어낸다. 결과는 말그대로 ‘판타스틱’하다. 카렐 제만의 세계는 테리 길리엄이나 팀 버튼처럼 동화적 감수성을 지닌 현대작가들에게 지속적이고도 거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므로 지금 카렐 제만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보는 것은, 독특한 현대 작가들이 펼쳐내는 상상력의 원류를 확인하는 작업이며, 조르쥬 멜리어스와 쥘 베르느로 대표되는 지난 세기초의 상상력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살아남았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꿈결같은 항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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