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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씨네콜라주] 로마의 휴일

<로마의 휴일>

“닉,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좀 뭐하지만 말이야. 자네는 우리 신문의 간판스타라고. 그러니까 신경을 좀 써줘야 하잖나?” “저야 신문 판매고를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죠.” “그거야 광고에서나 그렇지. 자네 칼럼 말야. 요즘 너무 하는 거 아냐? 이번 건 어제 석간에 나온 박스 기사랑 거의 똑같아. 그 신참내기 여기자랑 사귀고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어제밤에 그 여자가 불러주는 대로 썼나?” “이거 왜 이러십니까? 줘보세요. 뭐가 같다는 겁니까? 뭐가?… 음 비슷하긴 하네요.” “뭐가 비슷해, 똑같지. 쉼표가 자주 들어간다는 것 빼곤. 그 여자가 숨이 가빴나 보지?” “좋습니다. 이렇게 남들하고 똑같은 기사라면… 차라리 하루 쉬겠습니다.”

닉은 이렇게 자진 휴가를 냈다. 이번달 들어서만 벌써 사흘째. 그렇지만 회사에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막강한 인기가 아니라면 결코 신문 판매 부수 1위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닉은 어슬렁거리며 분수대가 있는 광장쪽으로 걸어갔다. 쭈욱 뻗은 아가씨들이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즐겁다. 그래, 이런 걸 기사로 써야지. 만날 선거가 어떻고, 주가가 어떻고… 닉의 고개가 점점 뒤로 돌아가더니, 갑자기 비틀하며 무언가에 부딪혔다. 툭, 투루루루, 닉에게 부딪친 아주머니가 그만 유모차를 놓쳐버린 것이다. 다리가 꼬인 닉은 엉겁결에 유모차를 따라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우다다다, 1면 톱. <열혈 기자 닉, 아기 구조 도중 추락사> 머리 속에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와당탕탕, 죽었구나. 그런데 이 향기로운 냄새는? 그래, 역시 천당으로 왔구나. 그런데 앞이 안 보여. 어디 계세요, 천사님? 그러자 부드러운 손이 닉의 팔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얼굴의 천사, 아니 하늘나라의 공주가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물론이죠. 공주님.” 그러나 공주 주위에는 우글거리는 악마떼가 배꼽을 잡아빼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재빨리 주변을 살펴 사태를 확인했다. 굴러 떨어진 닉은 홍보용으로 만든 대형 아이스크림 통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웃어젖히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도 있었다. 기사 사회면으로 옮김. 제목 수정, <인기 칼럼니스트 닉, 아이스크림 통에 추락> 닉은 창피스러운 마음에 얼른 도로로 달려갔다. 택시, 택시! 그러나 모두 다 달아나 버린다. 돌아보니 경쟁사 기자 녀석까지 보인다. 다시 라이벌 신문 1면으로 <사이비 칼럼니스트, 대낮 해프닝으로 망신살>. 부제 <칼럼 인기 떨어지자, 추잡스러운 행동으로 모면 시도> 그러나 그때, 빨간 스쿠터 한대가 그를 살려냈다.

“이봐요. 손의 위치를 좀 낮추지 그러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닉은 스쿠터를 몰고 있는 사람이 아까 그 여자인 걸 알게 되었다. “등에 비빈 크림은 다 닦아주셔야 해요.” “물론이죠. 다 핥아….” “뭐라고요?” “아, 아닙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오드리예요.” 오드리,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맞아, 오늘 이 도시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헵번 왕국의 공주잖아? “휴우, 이제 안 쫓아오네.” 오드리는 뒤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속도를 줄였다. 그래, 몰래 탈출했구나. 서민들의 생활을 즐기고 싶었던 거야. <오드리공주, 로맨스의 대탈주>, 부제 <섹시 칼럼니스트 닉과 염문설> 스포츠 신문 1면이다.

“저, 어머니가 노여워하실 텐데요.” 닉은 목소리를 깔며 친절하게 물었다. 오드리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저를 아세요?” “그럼요. 궁전에도 몇번 갔던 적이 있는 걸요. 직접 얼굴은 못 보았지만, 소문은 익히 들었죠. 엄청난 미인이라고….” “어머, 그러셨어요?” “걱정마세요. 경찰에 이르진 않을 테니까. 오늘 하루는 맘껏 휴가를 즐기시라구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요. 여기만 다녀와서요.” 그리고 오드리는 다리 사이에 있는 분홍색 보자기를 꺼내 어느 사무실로 들어갔다. 2면 상세 기사 제목, <도피 자금은 왕실의 보물을 팔아서>. 닉이 내일치 신문을 걱정하고 있을 때, 오드리는 궁전 다방 보자기를 풀러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오양, 헬멧 쓰고 다니라니깐.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요.”

등장 인물

닉: <아이 러브 트러블>로 잘 알려진 인기 기자 겸 칼럼니스트.

오드리: 오랫동안 궁전에서 살아온 신비의 여인. 아이스크림을 무지하게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