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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는 건재하다
2001-02-0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신현준

따뜻한 송년인사라도 드려야 할 시점에 한국경제가 썰렁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서 면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부운! ‘나라 빚 갚는다’는 나랏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장롱 안에서 금반지를 꺼내어 똥값으로 팔던 국민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게다가 이번이 한두 번째입니까. “졸라 매자”, “다시 뛰자”고 재탕삼탕 외치는 분들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면 이번에도 1∼2년 내에 극복할 겁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한 가지 찜찜한 게 있습니다. ‘드롭 아웃’ 사태 중에서도 제가 나온 (대)학교의 동문들이 실직했다든가, 거리에 나앉았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업이 쫄딱 망해서 야반도주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살아남는다”는 ‘한강의 기적’이 사라진 건 아닌 듯합니다. 한동안 푹 쉬다가 ‘빠방한’ 연줄의 도움을 빌려 언젠가는 재기에 성공하겠죠. 속에서 열불 나고 창자가 꼬이는 이야기지만, 그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어느 학교냐구요? 그 이름도 찬란한 경성제국대학교 후예인 국립서울대학교입니다. 어디 자랑할 데가 없어 이런 데서 떠드냐구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무려 20년 만에 저 학교에서 ‘명퇴’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차제에 그나마 남아 있던 연이 끊어지니 속이 시원해서 그럽니다. 위로금 대신 졸업장을 준다지만, 이걸 가지고 비굴하게 ‘자리’를 알아보는 일은 삼가려고 합니다. 만의 하나 “어서 옵쇼하고.” 모셔간다면 모를까(졸업장 같은 걸 두고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고 부르나요? 현실에 비해 개념이 너무 점잖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따지고보면 ‘운동권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저 캠퍼스’, ‘마이너 캠퍼스’라는 용어가 있었죠. 메이저와 마이너의 구분은 간단히 말해서 학력고사(요즘의 수능시험) 성적순이었죠. 메이저 중에서도 메이저인 그 학교 출신은 ‘정치범’이 되어 감옥에 갔다와도 마음만 바꿔먹으면 평생이 보장되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대학원’이라는 곳에 들어가면 서른이 넘어서도 놀고 먹을 수 있고, ‘유학생’이 되어 외국물을 먹고 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조직’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영락없이 학연의 위력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정·관계, 경제계(벤처계?), 교육계, 언론계, 방송계(취향에 따라 ‘계’자를 ‘판’자로 바꿔 읽어주십시오) 모두 예외가 아닙니다. 급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제가 무슨 과 몇 학번입니다”라고 말하면 많은 것이 설명됩니다. 이런 걸 ‘네트워킹’이라고 하나요. 역시 너무 점잖은 표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조직’을 멀리한다면 그 학교가 사회에 주는 폐해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종 시험이나 취직을 시도하지 않은 것도 제 취향이 반, 이런 동기가 반이었죠.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더군요. 어떤 책을 보니 문화평론가의 주류를 지칭하여 ‘서울대 깡패들’이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좀 심하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필자는 ‘학력파괴’의 유일한 장인 문화계마저도 서울대 출신의 입씨름장이 되는 현상이 보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이 문제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해에는 이 지면에 뜸하게 나타나는 걸로 자숙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올해 수능시험 직후 웹상에서도 ‘서울대 문제’에 대한 토론이 많더군요. “대한민국의 만악의 근원으로 보이는 입시교육이 서울대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비롯된다”는 주장은 좀 과장은 있지만 틀린 말이 아니더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해체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외국의 학술계에서는 서울대학교 등 몇개 대학의 논문만을 인정한다”는 현실론 앞에서 주춤하더군요. 그렇게 약한 모습 보일 필요없습니다. 제 대안은 전면적인 교육개방을 단행하고 서울대학교를 외국자본에 매각하는 것입니다. 공기업도 민영화한다는 마당에 못할 것 있습니까. 말이 지나치다구요? 좋습니다. 그러면 차선책으로 서울대학교를 지방의 산골짜기로 이전시키면 어떨까요?(사족이지만 하는 김에 ‘국’자 붙은 기관들, 예를 들어 국회의사당이나 KBS도 같이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지방에 있는데 왜 ‘서울’ 대학교냐구요? 과천에 있는 놀이공원도 ‘서울랜드’고, 성남에 있는 공항도 ‘서울공항’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아,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는 관악산도 산골짜기였군요. 어쩌나.

신현준/ 문화수필가 http://shinhyunjoon.com.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