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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오렌지다, 마이크 피기스의 <원 나잇 스탠드>
홍성남(평론가) 2000-03-28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라스베이거스를 떠났던 터라 마이크 피기스의 뉴욕행 발걸음은 제법 가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불과 350만달러의 제작비만을 가지고 빠듯하게 작업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완성해낸 그를 맞이한 프로젝트는 대본료로만 무려 300만달러를 지불한 조 에스터하스(<원초적 본능> <쇼걸>의 작가)의 값비싼 시나리오였다. 피기스는 외도를 주제로 한 원안의 기본 골격만을 유지한 채 에스터하스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자기 식으로 고쳐놓았고, 자존심 센 할리우드의 ‘스타 시나리오 작가’ 에스터하스는 크레디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줄 것을 요구했다. 뻔하디 뻔한 불륜의 이야기에 피기스 감독 특유의 도회적 감성을 한껏 불어넣어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원 나잇 스탠드>이다. 이 영화 역시 그의 전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처럼 섹스, 고독, 죽음, 욕망을 연주하는 도시의 심포니이긴 하되, 전작에 비해 더 가벼우면서 덜 우울한 곡조를 들려준다.

LA에서 단란한 가정을 갖고 있는 맥스는 적잖은 성공을 거둔 흑인 CF감독. 출장차 뉴욕에 간 그는 AIDS 진단을 받은 오랜 친구 찰리를 만난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카렌이라는 아름다운 금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다음날 맥스는 빗나간 열정의 흔적을 지워내려 애쓰며 아내 미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일년 뒤, 맥스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찰리를 만나러 다시 뉴욕으로 향한다. 찰리의 병실에서 그는 실로 불가사의한 우연과 마주한다. 여기서 일년 전 외도의 상대와 재회하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찰리의 형 버논의 아내였던 것. 하룻밤의 불장난은 갑자기 맥스와 카렌에게 예사롭지 않은 중대한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이미 스파이크 리의 <정글 피버>에서 백인 여성과 외도하다 된통 고생했던 웨슬리 스나입스가 여기선 중국계 부인과 독일 출신 백인 여성 사이를 오간다. 이쯤 되면 먼저 인종 문제에 대한 ‘정치적’ 언급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기스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원 나잇 스탠드>에서 인종을 가로지르는 결합이란 단지 도시의 풍경일 뿐이며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요약하는 키워드를 굳이 하나 고르라면 이 가운데 바로 우연의 힘과 그로부터 더욱 강조되는 삶의 불가해함일 것이다. 우연이 인연을 만들어가고 죽음은 만남의 교량 역할을 한다. 피기스는 이것을 찰리의 입을 빌려 “삶은 오렌지다”라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잘라 말할 순 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삶은 직설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 나잇 스탠드>는 그런 ‘우발적인 삶’으로 들어가 보라고 관객을 초대하는 영화다. 마치 잠시 눈을 감는 듯한 느낌을 주는 페이드 기법의 잦은 사용은 예측 불가능의 느낌을 강화한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너무 심각해할 필요는 없다. 피기스의 여느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원 나잇 스탠드> 역시 감각적인 비주얼을 ‘보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화면 위를 연이어 흘러가는 멋진 음악을 ‘듣는 영화’이니까 말이다. 매혹적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은 영화 자체를 분위기 있는 나른한 재즈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플롯이 받쳐주지 않는, 다소 공허한 겉멋이 주는 정서적 울림은 그 진폭이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캐릭터들은 파트너를 바꿈으로써 정서적 공동(空洞)을 메웠건만 우리의 그것은 또 어쩌란 말이지?

제2의 로버트 알트먼

감독 마이크 피기스

마이크 피기스(1949∼)는 흔히 ‘제2의 로버트 알트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영화감독이다. 할리우드의 주변부에서 작업하면서 자기의 색채가 두드러지는 그런 영화들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피기스의 영화들을 아우르는 주요 특징이라면 상당히 복합적인 심리를 가진 캐릭터들과 그들이 보여주거나 겪게 되는 정서적·물리적 폭력을 주로 묘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하나 그만의 표식으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뮤지션이라는 경력이 그에게 일종의 뿌리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자기 영화들의 음악을 직접 작곡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음악을 자신에게 본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태어나 케냐 나이로비에서 자란 피기스는 런던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에 리듬 앤 블루스 밴드인 가스 보드(Gas Board)의 멤버로 활동했다. 또한 70년대에 그는 피플 쇼(The People Show)라는 실험적 극단에서 작업하기도 했다. 런던국립영화학교에 응시했다가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 그가 영화계에 진출한 것은 영국의 유명한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퍼트냄의 눈에 들면서. 뉴 캐슬 재즈클럽의 이면을 누아르적으로 그린 <폭풍의 월요일>(1988)이 피기스의 영화 데뷔작이다. 미국에 진출한 그는 리처드 기어와 앤디 가르시아의 숨가쁜 대결을 그린 누아르풍의 형사물 <유혹은 밤그림자처럼>(1990)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이후 연이은 실패를 맛보던 피기스를 기사회생케 해 준 작품이 바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자살을 향해 치닫는 알코올중독자를 생생하게 연기한 니콜라스 케이지를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피기스가 최근 만든 <타임 코드>(2000)는 디지털 비디오로 찍은,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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