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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내게 떠나라 하네, <스탠 바이 미>

스티븐 킹의 소설 <The Body>는 “The most important things are the hardest things to say”로 시작한다. 내 인생의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The Body>의 첫 문장을 떠올린 것은 내 마음속 독방에 비밀스럽게 가둬두었던 나의 아픈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어렸을 때 화장실이나 다락방에 셀 수도 없이 갇혀본 경험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자유를 꿈꾸었다. 더 커서는 출가를 꿈꾼 적도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 노승은 나에게 역마살이 끼었으니 홀가분하게 떨치고 떠나라고 일러준 적도 있다. 그런 연유인지 난 길에 남다른 친밀감을 느낀다. 내 이름이 길 도(道)로 끝맺음되는 것을 보면 분명 운명적인 작명이 아닐까 싶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스탠드 바이 미> <블루> <제리 맥과이어>를 꼽는다. 외화 번역가의 길에 발을 담근 뒤로 많은 걸작을 만났지만 유독 이들 세편을 꼽는 이유는 모두 내 인생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블루>는 나를 외화 번역가로 데뷔(?)시켜준 작품이자 오랫동안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던 피멍자국을 지워버리게 해준 작품이기에 특별히 아낀다. 어둠 속에 갇힌 채 침묵의 고독만을 껴안으며 죽음을 준비하던 줄리도 빛과 음악과 교감하면서 새로운 삶을 위한 ‘길 떠나기’를 준비하지 않았던가! 불어로 ‘블루’(bleu)에는 ‘멍’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상실로 인하여 생긴 막막한 ‘멍’으로부터 푸르른 ‘자유’로의 비상! 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상징적인 제목인가!

<제리 맥과이어>는 인간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외화 번역가로서의 직업관을 정립시켜준 뜻깊은 작품이다. 약삭빠른 성공에 길들여지고 있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제리 맥과이어는 “적은 고객에게, 더 많은 애정을!”(Fewer clients, more attention!)이란 글을 써서 회사에 인간주의 경영을 촉구한다. 일에 대한 욕심과 돈벌이에 대한 집착으로 과속을 밟던 나는 <제리 맥과이어>를 만나면서 더 적은 작품에 더 많은 애정을 쏟으며 일하는 자세를 배우게 됐다.

<블루>와 <제리 맥과이어>가 나의 직업과 맺어진 인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이라면 <스탠 바이 미>는 내 인생의 영화 중 1순위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The Body>를 각색한 <스탠 바이 미>는 인상깊게도 길로 시작해서 길로 끝나는 영화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장면에서 흙길, 아스팔트 도로, 그리고 철로가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크리스, 고디, 테디, 그리고 번 등 네명의 성장기 소년은 실종된 청년의 시체를 찾아 여행길을 떠난다. 길이 상징하는 은유적 의미처럼 네명의 주인공은 시체를 찾아낸 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이틀간 우연한 만남과 예기치 못한 모험을 겪으며 훌쩍 성장해버린다. 훗날 작가가 된 고디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틀 사이에 마을은 전보다 훨씬 작아보였다”라고 독백한 것처럼!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의 커다란 뒷산엔 누구도 끝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고 알려진 긴 동굴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의 간을 파먹는 나병환자가 숨어 산다는 소문이 돌던 그 동굴 안엔 박쥐들이 참 많이도 살고 있었다. 친구들과 미군용 C레이션(ration) 빈 깡통에 헌 옷을 찢어 넣고 석유로 불을 밝힌 다음 누가 가장 깊숙이 들어갔다 오나 내기를 벌였다가 혼절할 만큼 혼쭐이 났던 나의 경험은 크리스의 친구들이 100피트 높이의 철로 위에서 뒤쫓아오는 기차에 깔리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달리거나, 거머리에게 고추가 물려 기절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겁나는 경험이었다. 나의 일행 중엔 사내들 사이에 무언의 쟁탈전을 자극하던 예쁜 소녀가 있었다. 난 내 또래들에 비해 깡이 달렸지만 그 소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과욕을 부릴 채비가 끝나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지 채 10분도 안 돼 또래들이 모조리 줄행랑을 쳤음에도 난 족히 5분은 더 들어갔다.

문제는 들고 들어갔던 깡통의 불이 사그라지면서 발생했다. 동굴 안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했던 어떤 암흑보다도 캄캄했다. 와락 울음이 터져나왔다. ‘엄마아!’ 소리를 얼마나 질렀는지 모른다. 벽을 더듬으며 긁으며, 거꾸로 기며 걸으며 천신만고 끝에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불쑥 그 소녀의 존재를 떠올린 나는 서둘러 눈물자국을 지우고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때 한무리의 어른들과 친구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의기양양해진 난 그들을 향해 보란 듯 미소를 머금었다. 순간 내 뺨에 불꽃이 튀었다. 그것도 다섯번 연달아서! 안도감에 앞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아버지의 불세례였다.

그러나 난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뒤돌아 본 동굴이 어쩜 그렇게도 친근해보이던지! 그 몇십분 사이에 난 스스로도 대견스러울 만큼 성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40년을 살아오면서 가끔 난감한 독존에 빠지면 난 그 시절의 동굴을 떠올리며 넉넉한 미소를 짓곤 한다. <스탠 바이 미>가 내게 그처럼 소중한 이유는 늘 나에게 정신적인 성장을 꿈꾸게 해줬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소설과 인간의 성장을 다룬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는 까닭은 바로 그런 사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의 의미와 직결되는 길을 소재로 만든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젤소미나의 길과 윌 헌팅의 길과 아이다호의 길과 까밀라의 길과 카우걸의 길…! 새 영화에서 그런 길을 만나면 내 마음은 늘 흥분으로 길길이 날뛴다. 그럴 때마다 난 또다른 성장을 꿈꾸며 훌쩍 떠날 준비를 한다. 길은 떠나라고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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