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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고전주의의 물결 [1] - 공연·TV
사진 이혜정남은주 2005-06-10

공연·TV·사진·상품을 통해 본 우리 시대 복고주의의 새 얼굴

복고는 죽지 않는다. 다만 되풀이될 뿐이다

복고주의는 보수주의다, 반동이다. 창조를 가로막는 꼰대다. 손 안 대고 코푸는 장사다. 천박한 유행이다. 라면 하나를 먹더라도 추억에 기대야 하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영혼은 불안하고 불행하다. 그런데 그 감수성이 모여 복고주의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다. 자신을 낳은 부모를 죽이고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있다. 마리우스 프티파의 <백조의 호수>와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 최인호의 <해신>과 드라마 <해신>은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한 형제가 아니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옛 동료에 불과하다. 원래부터 그랬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며, 인간이 만든 것 중에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일 만큼 기발한 것이 어디 있었나. 과거에 빚지고 새 길을 가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다. 그래서 지금 복고주의로부터 무언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안타깝게 조짐을 들여다본다.

공연: 성(性)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원작의 성전환 수술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넌센스 아멘>·<6월의 아트>

<6월의 아트> 원작인 남자버전의 <아트>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올 봄 공연계는 엉뚱하게도 ‘성전환 수술’에 합의하면서 불황의 공연계를 벗어날 길을 찾는 듯하다. 고전발레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 내한 공연을 시작으로 <넌센스>의 남성판 <넌센스 아멘>, <아트>의 여성판인 <6월의 아트> 그리고 트랜스젠더 가수 이야기인 <헤드윅>까지 줄곧 트랜스 섹슈얼 바람이었다. 이중 <헤드윅>을 제외한다면 고전작품이나 공연계의 클래식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성(性)을 바꾸어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난 경우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무대 뒤에서 뛰어나가던 그 마지막 장면으로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바로 그 작품이다. 벌거벗은 상반신은 근육의 아름다움을 무참히 드러내고 검게 칠한 눈매와 푸르게 깎은 머리의 남성 백조들은 그 근육을 힘과 카리스마로 형상화한다. <백조의 호수> 초연 이후 다시는 발레 음악을 만들지 않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던 차이코프스키나 반면에 그 협주곡의 사소한 디테일, 예를 들면 오보에나 플루트의 섬세한 떨림까지 발레리나를 위해 작곡된 듯 만들어낸 러시아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는 100년 뒤 자신들의 작품이 이렇게 새로운 옷을 입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여러 개의 발톱을 빠트리면서 1.2cm의 점을 딛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신의 경지를 꿈꾸던 수천의 발레리나, 발레리노와는 달리 극장 안내원으로 일하다가 스물두살에야 처음 무용을 시작한 매튜 본이라는 안무가는 이 고전극을 일약 지상으로 내려놓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동시에 받은 이 작품은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98%의 관객점유율을 달성했다. 고전적인 레퍼토리에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관객을 끌어들인 것이다.

또 <넌센스 아멘>은 올해 대학로 ‘뮤지컬 열전’ 첫 번째 작품으로 야심차게 준비된 뮤지컬로 우리가 알고 있는 수녀들의 이야기 <넌센스>를 남자들의 이야기로 바꾸어 새로운 재미를 시도했다. 줄거리, 무대 장치, 상황 설정 그대로 두고 단지 성별 하나 바꿨을 뿐인데 청순하게 흥겹던 극이 이제는 누구 눈치볼 것 없이 오직 재미와 풍자로 낭자하다. <6월의 아트>는 기존 남자들의 수다인 <아트>를 여자들의 수다와 우정의 이야기로 바꿨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를 생명으로 하는 이 연극에서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농담과 딴죽, 시기어린 싸움질이 여자들의 호쾌하게 ‘지지고 볶는 모드’로 바뀌면서 남자 <아트>에 출연하는 권해효와 <6월의 아트>에 출연하는 조혜련이 만드는 차이만큼이나 전혀 다른 연극으로 태어난다.

<6월의 아트> 연출 이해제

“원작을 거울처럼 비추는 연극 만든다”

6월부터 동숭아트에서 시작되는 <6월의 아트>는 여자들의 수다와 싸움, 우정을 그린 연극이다. 이 작품을 각색 연출한 이해제는 연극 <아트>의 미덕 이상을 <6월의 아트>에서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 “억눌렸던 기억과 감췄던 갈등을 다 끄집어내면서 싸운다는 점은 똑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싸우고 화해하면서 눈물 흘리고 마음을 치료하는 과정을 겪더라고요. 여자들의 싸움은 결국 카타르시스로 끝납니다.” 배우와 관객의 요청으로 세계 처음으로 <아트>의 여성판을 각색하면서 그는 처음에는 여성 심리를 탐색하는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극을 만들면 만들수록 연출자의 몫보다는 배우들의 본성과 감성의 몫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이 작품을 파생 텍스트라고 부릅니다. 원작을 완전히 뒤집어 재미를 주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마음의 깊이를 들여다보려는 원작의 취지에 맞게 여성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지요. 누가 비추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매회 섬세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아트>만큼이나 이 연극도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TV 드라마: 허구가 아니라 새로운 원작이다!

사극의 재창조- KBS의 <해신> <불멸의 이순신>

<해신>

이처럼 잘 팔리는 극을 새로운 이미지로 단장해서 관객을 붙들어두려는 공연계의 변화가 아무리 괜찮은 고전도 계속 변화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면, 그와 반대로 최근 TV사극의 변화는 아무리 진부하고 고전적인 소재라도 사람들의 감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모티브를 찾아낸다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청률 1위를 고수했던 <해신>은 아예 삼국시대로 멀찍이 떨어져서 캐릭터와 일화 구성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장보고의 숙적인 자미 부인(채시라), 장보고가 평생 마음에 담는 여인 정화(수애)처럼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물들은 역사 고증과 지나간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을 엮어 자유롭게 직조한다. 심지어 장보고라는 인물까지도. 물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미천한 반역자”로 매도했던 장보고라는 인물을 호쾌한 영웅으로 만들기까지는 고전을 거스르는 학자들의 노력과 새로운 사관을 담은 최인호 소설 <해신>이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대중성 있는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원작 훼손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소년 궁복이 중국에서 거상 설평을 만나기까지 14회 동안을 장보고의 캐릭터 하나를 공들여 키우는 초반 허구의 과정이 후반부 본격적인 대결과 애증의 논리적인 원인이 된다. 실패한 반역자 장보고를 패자의 역사에서는 야망과 회한을 담은 위대한 인물로 형상화함으로써 거대한 자연과 역사의 흐름 앞에서 보잘것없는 인간 존재가 느낄 수 있는 숭고미를 드러낸다.

<불멸의 이순신>

민족적, 남성적인 권력을 담은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도 원작 훼손을 통해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 경우다.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과 김훈의 <칼의 노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음이 느껴진다. <난중일기>의 모티브는 잊혀진 지 오래다. 첫 시험운항에서 거북선이 침몰하고 100여명의 수군이 수장된다는 극 내용은 실제 역사에서는 있을 법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영웅의 극적인 실패와 부활을 위해 아낌없이 원작과 사료가 희생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방대한 스케일이라는 기본기를 바탕으로 역사 속의 인물 재현보다는 성웅의 인간적인 고뇌와 무용담에 주력함으로써 ‘역사 이상의 허구’를 원하는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다. 원작은 기억되지 않으며 만들어진 드라마 속의 이순신만이 역사 속의 인물과 비슷한 무게로 남는다.

김종학프로덕션 제작담당 박창식 이사

“10% 판타지의 힘이 사극의 모든 것”

<해신>의 성공에 힘입어 김종학프로덕션에서는 올 하반기 두개의 블록버스터 사극을 준비 중이다. 하나는 <대장금>의 이병훈 PD와 김영현 작가가 만들어내는 <서동요>고, 다른 하나는 김종학, 송지나 콤비와 함께 배용준이 주연을 맡은 <태왕사신기>다. 김종학프로덕션의 박창식 이사는 이 사극의 밑그림을 그리고, 사극의 바탕이 되는 온갖 자원을 갖추는 일을 한다. <서동요>의 백제시대와 <태왕사신기>의 고구려 시대를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서 아예 충남 부여와 강원도 일대에 세트장을 새로 짓고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건축비만도 합쳐서 200억원가량 된다. “1년 동안 각자 뼈빠지게 자료 찾고 고증해서 결국 모든 사극 제작팀은 민속촌에서 만나더라는 말이 있죠. 원전에 충실한 사극이 되기에는 자원이 너무 부족합니다.” <야망>과 <백야3.98>을 위해 겁없이 군 트럭과 군함을 공수해오던 그지만 역사극에서는 아예 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절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빈 공간이 역사극만이 갖는 매력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학자들의 도움을 얻고 돈을 들여도 결국 100%의 정확성은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빠른 템포의 음악이나 고증을 무시한 강렬한 비주얼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낳는 경우가 많지요. 원작 훼손? 사극은 원래 90%의 고증과 10%의 판타지를 향해 달려간다고요. 가끔은 10%의 판타지가 사극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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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