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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책 안 읽는 그대들에게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대학교 강의실을 향하는 기분은 ‘만감이 교차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모종의 기대감까지 지울 수는 없다. ‘이 나이에 무슨 시간강사?’라는 생각에 학교 출강은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자마자, 어떻게 마음을 들켰는지 연락 오는 곳도 한 군데 없는 상황은 솔직히 꽝이었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마음이 설렌다. ‘젊은 제자들과 세상에 대해 함께 토론한다’는 마음이냐고? 이런 촌스럽고 덜떨어진 생각이라니, 그런 강사는 영화 <세기말>에 나오듯 개그맨보다 더 웃기던데.

역시나 범생이 출신 아저씨의 머리는 거기서 거긴가 보다. 강의 몇번 ‘뛰고’ 나니 설렘 같은 건 온데간데없어지고 ‘요즘 대학생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지식인 얕잡아보기’가 대세인 요즘 분위기에서 이런 말하면 입에 거품물고 으르렁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대학생들은 ‘공부’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공부라는 게 뭐 꼭 그런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을 돌리면 ‘책 읽기’는 자신의 인생과 별 상관없어 보인다. 주교재와 참고자료라고 몇권의 책을 선정해 주었건만 ‘정말로’ 읽어 오리라는 기대는 거두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이럴 때 지식인 아저씨들의 못난 버릇은 ‘옛날’을 떠올리는 것이다. 책 읽는 행위가 인생에서 꽤나 중요했던 시절 말이다. 체계고 방법이고 나발이고 없이 닥치는 대로 읽어대고, 읽어댄 만큼 정신세계가 풍요로워지는 듯한 착각으로 버텼던 나날들 말이다. 좌중에서 잘난 척하는 데도 제격이었다. 그러니 공부 방법은 주로 독학이었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참고’였을 뿐이다. 외국어 공부란 것도 무모하게 원서에 도전하거나 외국인과 만나서 습득하는 식이었지, TOEIC 같은 ‘교재’를 들고 이어폰 끼고 다니지는 않았다.

이런 생각은 다분히 ‘옛날이 좋았지’라고 때워버리는 치매의 소산이리라. 그렇게 마구잡이로 공부한 결과가 지식인 사회를 이 모양 요꼴의 동네북 신세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정확한 진단이야 2050년쯤 누군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이라도 쓰면서 연구할 문제다. 요지는 공부하는 방식이 참 달라졌다는 것이다. 요즘 공부는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쌈빡한 ‘교과서’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수강’이 있어야 한다. 강의나 시험에 신경 안 쓰고 참고문헌 이것저것 뒤져서 공부하는 일은 영 낯선 모양이다. 학교 공부는 지지리 재미없고 맥빠져 하면서도 학원들은 나날이 창궐하여 강의실이 미어터지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딸딸 외우는 게 전부 같은 고시 공부마저도 책 싸들고 절간에 들어가서 독학하는 건 전설이 되었고, 공장식으로 단기 완성해주는 사설학원 강의가 더욱 효율적인 모양이다.

알고 지내는 후배 강사는 교재를 여러 권 정해주면 ‘애들이 싫어하므로’ 한권만 달랑 정해 줘야 된다고 조언해 주었다. 역시 그것도 노하우가 있는 거군.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가 출강하는 학교는 올해부터 분위기가 싹 달라졌는데, 주교재는 물론이고 참고문헌을 알려줘도 눈알이 초롱초롱 빛나면서 열심히 적어가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야, 그 학교 싸가지 있네’라고 속으로 생각했건만 이유는 ‘깨는’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학부제를 도입하여 학점 순으로 학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걸 두고 ‘신자유주의적 교육 반(反)개혁’이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점차 피 튀기는 살벌한 분위기가 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공부해서 뭐하냐고요? “흠… 그건 말이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건 신자유주의적 여피(yuppie)의 윤리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공부하는 건 적어도 ‘얼터너티브 애티튜드’라고 할 수 있겠죠. 김수영도 지식인이란 ‘인류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견강부회지만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란 것도 넓게 보면 비슷한 것 아닐까요?… 김수영이 누구고, 그람시가 누구냐구요? 이런 말 도통 씨알이 안 먹히겠네요. 그만 징징거리고 어떤 가수가 노래했던 것처럼 ‘공부해서 남 주자’는 말이나 조용히 실천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라’는 꼰대같은 말 집어치우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도 때로는 ‘니네들 정말 이러면 안 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신현준씨의 이메일 주소는 gilles@nownuri.net입니다.